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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횡단 기찻길

by 문성 moon song

시베리아횡단열차는 많은 역을 지나쳤다. 아주 작은 마을은 이삼분 만에 지나치기도 했지만 큰 도시에서는 삼사십분이 넘도록 정차를 하기도 했다. 열차여행을 몇 차례한 뒤라 이제는 열차칸에 붙은 시간표를 보고 어느 역에서 몇 분을 쉬는지 확인해두었다가 역 주변을 거니는 여유를 부리곤 했다. 시베리아기준시에 맞춰놓은 손목시계를 차고 플랫폼에 내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플랫폼을 오가는 사람들과 그곳에 늘어선 주민들이 파는 음식이나 물건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역주변이나 기찻길을 발길이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탁트인 공간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기분전환을 하고 나면 오랜 시간 덜컹거리는 기차안에서 지내며 나도 모르게 흔들리던 마음이 편안해지고 다시 열차를 타고 달려갈 새로운 곳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한 시간 가까운 긴 시간을 정차했다. 플랫폼에서 빵도 사고 사람들도 구경하고 역사 주변을 기웃거리고도 시간이 남아 기찻길을 걸었다. 하얗게 부서지던 햇살이 노오랗게 물든 기찻길에는 나 말고도 여러명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다들 달리던 열차에서 잠시 내렸다가 다시 달리기까지 그 시간을 말없이 음미하고 있었다.
그 순간. 도착했다가 다시 떠나기까지 그 사이의 순간. 문득 도착했다가 떠나던 또 다른 순간들이 겹쳐졌다. 상트에서 불멸의 피아니스트가 기차역으로 향하던 나를 붙잡고 라흐마니노프 CD를 쥐어주던 그 순간. 모스크바를 안내해주던 유학생과 친구가 되어 헤어지며 손을 흔들던 그 순간. 카자흐스탄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던 기차에서 사귄 카자흐스탄 아주머니가 나를 안아주고 돌아서며 눈물을 글썽이던 그 순간. 도착했다가 떠나던 그 순간들이 한꺼번에 겹쳐져 저물어가는 햇살속에 스러지고 있었다. 따뜻해지면서도 저릿해지는 여운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문득 여행은 인행의 압축판이라던 한비야의 말이 떠올랐다. 여행은 인생의 순간들을 압축해서 겪는 것과도 같다던 그 말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사람들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시간과 장소에서도 역시 여행은 도착했다가 떠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모든 순간들이 도착했다가 다시 떠나기까지 그 사이의 순간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지는 풍광을, 이제는 황금빛으로 부드럽게 퍼지는 햇살과 흐릿해지는 그림자 너머 끝없이 이어지는 기찻길을 눈에 새겼다. 그 순간 그 자리를 소중히 기억하리라 그 순간을 이후 매 순간을 소중히 보내리라 다짐했다. 상투적인 그 표현 그 의미를 새삼 곱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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