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쿠츠크에 대한 첫인상은 그곳을 떠날 때까지도 바뀌지 않았다. 이르쿠츠크는 좋게 말하면 자연에 온전히 파묻힐 수 있는 곳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자연에 지독히 고립될 수 있는 곳이었다. 어디를 걷든 인적은 언제나 드물었다. 위키피디아에 실린 자료에 따르면 시베리아의 평균 인구밀도는 1제곱킬로미터에 세 명. 십여년 전 그 때 그곳에서 인적이 드문 건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루이틀은 그곳의 분위기를 즐겼지만 차츰 고즈넉함을 넘어 적막함을 이윽고는 경외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은 이르쿠츠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을 한꺼번에 느끼게 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한눈에도 비바람에 시달린 목조가옥들과 제 멋대로 자라난 가로수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검붉은 페인트로 덧칠하거나 빛바란 고동색으로 변해버린 판자를 그대로 드러낸 집의 외벽보다는 푸른 이파리를 드리운 나무들이 훨씬 활기가 넘쳤다.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에는 이따금 트럭이나 화물차가 오갔지만 검은 흙바닥에 군데군데 낙엽이 쌓인 인도에는 나외에 누구도 오가지 않았다.
데카브리스트 박물관도 역시 빛바란 고동색으로 만든 목조가옥이었다. 주변의 가옥들과 그리 다를 바 없는데다 역시나 사람이라곤 나 하나뿐이어서 매표를 하는 직원이 없었다면 그곳이 박물관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직원은 상냥하게 표를 건네주었지만 간만의 관람객이 낯선 듯 내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도 멀리서 지켜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기록물, 역사화, 사진, 유물들을 둘러보며 1825년 봉기를 일으킨 청년장교들을, 이듬해 이곳으로 유배당한 그들의 역사를 더듬었다.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기찻길을 놓아야했던 죄수들, 유배와서 노역을 해야했던 정치범들, 그들을 따라 귀족의 삶을 버리고 정착해서 그들을 뒷바라지했던 아내들, 혁명이 되고나서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해야 했던 유태인, 고려인, 수많은 소수민족들.
그때의 그들이 겪었을 시베리아, 그들이 세워나간 이르쿠츠크와 지금을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이곳은 다른 도시들에 비해 외딴 곳이었다. 나같은 여행객에게도 실낱같은 한줄, 기찻길로만 들어왔다 나가야하는 고립된 땅덩어리였다. 나는 이곳에 경외심을 느끼고 있었다. 막연한 두려움에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깊숙이 들어가보고 싶었다. 이르쿠츠크라는 유배지에 나 자신을 고립시키고 싶었다. 대개는 하루이틀 머물고 떠나는 이곳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돌이켜보면 사실은 나 자신을 실험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 자신을 대면하고 싶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