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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알흔

by 문성 moon song

알흔에서 이틀쯤 지내고부터 날씨는 계속 변덕스러웠다. 해가 났다가도 금세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하늘은 일부러 짓굳게 굴기라도 하듯 찌푸렸다가 비를 뿌리고 햇살을 비췄다가 방심한 순간 또 다시 찌푸리며 비를 뿌렸다. 예약했던 유람선도 취소가 되고 호숫가를 산책하다가도 숙소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숙소 근처를 맴도는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워 꼼지락거리며 일기를 쓰고 처마 밑 테이블에 앉아 따끈한 차이를 마셨다. 잠깐 비가 그친 틈을 타 산책을 하다가 흩뿌리는 비에 종종걸음으로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빗속에 젖어드는 알흔의 마을을 바라봤다. 날씨 때문에 도리없이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여행을 하며 언제나 떨치지 못했던 강박, 새로운 경험을 해야한다는 의무감을 미뤄두고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알흔의 마을은 니키타의 집과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나무로 만든 것들이었다. 페인트칠도 하지 않고 단면을 다듬지도 않아 손을 대면 가시가 박힐 듯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날 것 그대로의 통나무들을 쌓아 만든 것이었다. 벽과 지붕 그리고 창틀까지도 어린 아이의 그림에 등장할 법한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비바람에 닳고 바랜 통나무집들은 또 다시 비에 젖어 단순하고 소박한 삶만을 허락하는 알흔을 보여주고 있었다.

처마 밑 의자에 앉아 마을을 스케치했다. 잠시 연필을 놓고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려는 순간 비가 그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안개가 피어올랐다. 헐벗은 능선과 먼 거리의 집들이 사라지고 곧이어 건너편의 집들도 바로 앞의 울타리마저 사라졌다. 눈앞에는 안개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뻗자 손가락 끝도 희미해져 보이지 않았다.
잠깐 새 모든 걸 집어삼켜버린 하얀 세상이 신비했다. 경이로웠다. 두려웠다. 외로웠다. 철저히 혼자였다. 가슴이 뛰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쁘지 않았다. 상쾌했다. 전율했다. 거리낄 것이 없었다. 누구든 무엇이든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자유로웠다. 손이 다시 연필을 잡았다. 제 의지가 있는 듯 생각할 겨를도 없이 움직였다. 재빠르게 스케치를 마무리했다. 또 다시 순식간에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알흔의 안개가 선사해준 강렬한 그 순간을 선명히 기억한다. 혼자라는 게 무엇인지 실감케 해주었던 그 순간. 엄청난 외로움과 동시에 엄청난 자유로움을 맛보았다. 그 두 가지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한쌍임을 깨달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사람들 속에서 흔들리는 내 마음을 고민하기를 그만둘 수 있었다. 수많은 나 속에서 정답같은 나를 찾아헤매는 걸 그만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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