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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Feb 26. 2021

나를 위한 사이비 애자일(Agile)


 지금은 좀 결이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처음에 나는 개발 직군으로 입사했다. 회사 특성상 개발자보다는 개발 PM의 역할을 해야 했는데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이 PM을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PM의 보조인 셈이었다. 

 

 그 시기 내가 속해 있던 개발 본부의 가장 큰 화두는 플랫폼과 애자일이었다. "플랫폼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종 목표이고, 애자일은 우리의 목표를 이룰 수 있게 만드는 일하는 방식이다." 뭐 이런 식으로.

 본부장님의 플랫폼&애자일 선언에 맞춰 바로 업무 지시가 떨어졌다. 각 PM들은 각자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개발사와 논의하여 애자일 방식을 적용할 것.강제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는 단순 권고 사항이었지만, 그 권고 사항의 아래 당구장 표시 옆에 연말에 애자일 방법론 적용 후기를 공유하는 자리가 있을 것이며, 우수한 성과를 낸 부서를 선발할 예정」이라는 첨언이 붙은 것으로 보아 이건 강제임이 틀림없었다.


 개발사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같은 팀의 선배들, 그러니까 각자 개발사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PM들이 듣고 온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긍정 부정의 여부를 떠나서 우선 '지금 우리 회사 분위기로는 애자일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윗사람이 보고 자주 듣고 그때마다 요구사항 바꾸려는 것 아니냐. 그렇게는 프로젝트 못한다." 거나, "애자일은 원래 그렇게 얼른 해보고 고치고 하는 거야- 라는 말로 얼마나 자주 고치게 만들려는 거냐. 그럴 거면 납기 일자를 정하지 말라." 등의  강성 의견도 나왔다고 했지만, 애자일을 도입하려는 회사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결과는... 이미 헤비급이 되어버린 선수가 자신의 변해버린 덩치를 인지하지 못하고 경량급 시절의 경쾌한 풋워크를 하려면 제대로 될 리가 없는 법. 결국 일하는 방식의 근본적 개선이나 조직문화의 변화 없이 진행된 애자일 방법론 도입은 구호로만 남았다가 그마저도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수년이 흐른 지금... 회사에서 다시 "애자일 하게 일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개발본부뿐 아니라 회사 전체 조직을 대상으로.




  이전의 시도가 왜 실패했는지는 접어두고, 앞으로 어떻게 적용하겠다는 것도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 없으니 역시 접어두고. 어쨌든 회사에서 '더 나아지기 위한' 방법으로 애자일 방법론을 택하려는 듯 하니, 내게도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애자일 소프트웨어 개발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5%A0%EC%9E%90%EC%9D%BC_%EC%86%8C%ED%94%84%ED%8A%B8%EC%9B%A8%EC%96%B4_%EA%B0%9C%EB%B0%9C


애자일 - 네이버_용어로 보는 IT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8302&cid=59088&categoryId=59096


 위의 두 링크가 아니어도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애자일에 대해 다룬 수많은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전문적인 설명이 곁들여진 자료들도 있으므로 애자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나의 어설픈 정리보단 이런 자료들을 찾아보는 것이 훨씬 유용할 것이다. 다만 스스로에게 적용하기 위해 애자일이라는 것의 개념을 정리해 보았더니


일단 빠르게 해 본 뒤 피드백을 통해 얼른 고치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상황에 맞게 반복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것


이라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실제 프로젝트에서 활용하려면 훨씬 많은 것들을 고민해야겠지만, 일단 나 혼자 할 개인 프로젝트의 방법론으로는 이 정도 이해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면 문제는 이 사상을 어떻게 써먹느냐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계획대로 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직무 검사였나 성격 검사였나. 무튼 어떤 검사를 했을 때 나왔던 결과였는데 나를 너무 잘 설명하는 것 같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말이다. 저 말처럼 나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뜸을 들이는 시간이 무척 길다.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도 느릿느릿하지만 그렇게 세운 계획에 대한 확신도 없어서 기껏 짜 놓은 계획을 바꾸느라 또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그 일을 하려고 생각했던 이유와 의지는 흐릿해지고, 굳이 그 일을 하지 않아도 어찌어찌 잘 살고 있으므로 결국 하지 않게 된다. 브런치로 치자면 작가의 서랍에는 글을 잔뜩 써두지만 발행까지 가는 글은 없는 셈이고 책을 쓰는 것에 비유하자면 목차와 도입부만 쓰다가 혼자 지치는 셈이다.


 자기반성의 시간을 잠시 가져보니 나름대로 정리한 저 애자일 사상이라는 것, 내게 무척이나 유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날 계획 세우느라 시간 보낼 것이 아니라 뭐가 되든 일단 해보기. 해보고 아닌 것 같으면 주위 피드백을 받고,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계속해보기.

 기존의 워터폴(waterfall) 방식에 비해 애자일은 유연하게 변화를 수용하며 점진적인 발전을 추구하는데 이점이 있는 반면 (잦은 수정 등에 의해) 최종 납기는 더 늦을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나는 내게 무척이나 관대하며 언제 갑자기 야근이나 약속이 생길지 모르니 유연하게 변화를 수용하는 것은 필수적이고, 어느 날 깨달음을 얻어 새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니므로 점진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 개인 프로젝트의 납기는 내가 정하는 것이므로 조금 늦어지는 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종 납기는 죽기 전에만 끝내면 되지 뭐.


 이거 아무래도 나처럼 미적대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행동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보자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엔 좀 다르게 표현해 봐야겠다. 올해는 좀 애자일 하게 살아봐야겠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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