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r text Mar 07. 2021

결혼식 축가의 조건

신부에게 사랑고백을 하지 말 것


 친한 동기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얼마 전에 다른 친구에게 결혼식 축가 부탁을 받은 터라 오늘은 요 몇 년 동안 다녔던 결혼식 중에 노래를 가장 많이, 집중해서 게 되었다.


 첫 노래는 <미녀와 야수>의 주제가, <<Beauty and the beast>>였다. 신랑 입장에 맞춰 시작된 노래는 아버지와 함께 입장한 신부가 남편의 손을 잡는 순간에 맞춰 절정으로 치달았다. 구성이며 실력이 대단해서 과연 프로의 무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세상에 그리 많은 좋은 노래들 중에 왜 저 곡이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신랑 신부에게 의미 있는 노래라서 직접 고른 거라면 할 말 없지만 차라리  <<A whole new world>> 같은 노래가 더 좋았을것 같은데. 신랑이 야수처럼 생기지도 않았던데 혹시나 신랑 측 부모님이 싫어하시지는 않을까 - 우리 애가 왜 야수야! - 하는 오지랖이 들었다. 그래, 야수가 본래의 모습을 찾은 마지막 장면을 연출했나 보지 뭐.


 뮤지컬 배우 섭외된 결혼식이었으니 축가도 당연히 그들이 할 줄 알았는데 정작 축가를 준비한 것은 친구들이었다. 그것도 신랑 측 신부 측에서 각각 한곡씩. 하객들이 뮤지컬 배우들의 노래를 먼저 듣게 된 상황에서 일반인에게 축가를 시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잠시 우려했지만 축가를 하는 이들의 실력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축가를 부른 친구들은 모두 남자였다. 한 명은 한동준의 <<너를 사랑해>>를 다른 한 명은 마크툽의 <<Marry me>> 를 불렀데, 두 곡 모두 상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의 가사였다. 신랑 신부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다른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의 가사가 '너를 사랑해'라거나 '나와 결혼해 줄래요?' 라니. 짗궂은 장난기가 머릿속에서 뻔한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은 저 노래하는 사람이 신부를 좋아했던 건 아닐까? 같은 진부한 내용이었지만, 노래를 잘 부르면 잘 부를수록 상상은 더해갔다.


 결혼식에 와서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앞서 말한 친구가 축가를 부탁한 후부터였다. 그 친구가, 엄밀히 말하자면 친구의 여자 친구가 축가로 바라는 노래의 조건은 딱 하나였다. "신부에게 사랑고백하는 노래가 아닐 것." 남자 친구와 가장 행복한 순간을 함께하고 있는데 다른 이에게 사랑고백을 받으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더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신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가 아니어야 한다'는 조건은 '내가 과연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만큼이나 어려운 조건이었다. 일단 평소에 듣던 노래 중에서는 그런 가사의 노래가 없었다.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가 아니라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를 두어 곡 정도를 찾아냈지만 그나마도 혼자의 실력으로 부르기엔 턱도 없었다. 역시 지난번에 더 확실히 사양했어야 했는데. 이게 그렇게 어려운 조건일지 그때는 몰랐지.


 이 노래였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생각했던 <<a whole new world>>는 신랑 신부의 퇴장 행진곡이었다. 퇴장하는 순간에 맞춰 들으니 제법 두 사람의 앞날을 축하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선곡에 참고할만한 노래는 아니었다.

 대체 어떤 노래를 골라야 네가, 네 여자 친구가 기뻐할까? 어떤 노래를 불러야 나도 수치스럽지 않게 잘 해낼 수 있을까? 편협한 플레이리스트에는 여전히 마땅한 노래가 걸려들지 않았다. 나 그냥 축가 안 하면 안 되겠니?

작가의 이전글 퇴직 인사드립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