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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May 15. 2021

나이를 먹는다는 것(1)

에세이

-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거 보니까 왠지 네 생각이 난다.

      

 창밖에 내리는 비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친구에게 생뚱맞은 메시지가 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대화창을 열어보니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책을 읽다 찍은 걸까. 하얀 배경에 적힌 두 줄짜리 문장.

      

3분의 세계가 시작하는 순간은 늘 처음인 것도 같다.
반복되는 처음이라니, 이거 꽤 근사하잖아?

    

 유명한 글귀인가 싶어 인터넷에 찾아보니 서효인 작가님의 에세이집, 『아무튼, 인기가요』에 수록되어 있는 문장이었다. 앞 뒤 맥락을 모르니 이 문장이 담고 있었을 원래의 의미는 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뚝 떨어져 나온 두 문장을 몇 번씩 곱씹으며 읽다 보니 그 안에서도 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이 울림의 정체가 뭔지 알고 싶어 메시지를 보낸 친구에게 되물었다. 이 문장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길래 내 생각이 났는지 떠올려 보라고.

     

- 그냥. 알고 지낸 지 20년이 됐는데 저거 보니까 왠지 너랑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이 난 것 같기도 하고. 네가 나한테 참 좋은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런 애틋한 감정을 주고받은 적이 없어 바로 답장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얘 왜 이러지. 무슨 일 있나? 비가 와서 그런가? 아니면 낮술이라도 했나? 설마 맨 정신에 이러는 건 아니겠지? 20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세월 동안 알아온 친구였지만 이런 기습 공격은 몇 번을 당해도 적응이 어려웠다.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중학생 소년들이 ‘우린 이제 진짜 친구인 거야!’라고 다짐하는 눈빛을 주고받는 그런 느낌. 어?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이 났다는 말이 이런 건가?

     

 함께한 시간과 우정의 깊이가 꼭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경우엔 함께한 시간이 길수록 우정의 깊이도 깊어지기 마련이다. 이는 수학적으로도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다. 14살에 처음 친구가 된 두 명의 친구가 있다고 하자. 이들이 친구가 되고 1년이 지났을 때 둘이 친구로 지낸 시간을 A, 각자의 나이를 B라고 하면 각자의 삶 속에서 상대와 함께 한 시간은 1/15이 된다. 이렇게 10년이 지나면 A와 B의 비율은 11/25이 되고, 20년 후엔 21/35, 30년 후엔 31/45 ……. 중간에 다퉈서 친구가 원수가 되었다거나 인연이 끊겨서 남이 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 친구와의 우정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커지는 셈이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 보니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에 알게 된, 그래서 서로 마음으로 사귀었던 친구들과는 기본이 10년, 많으면 20년의 시간을 함께 쌓아온 셈이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이가 된 친구들. 이들과는 여전히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도 아무 때고 맥락 없이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사이로 남게 되었다. 


https://brunch.co.kr/@mr-text/28


 예전에 썼던 글 중에 우정이란 마일리지 같다고 했던 적이 있다. 누구와 어디에서 어떤 관계로 만나 얼마만큼의 시간과 감정을 어느 정도의 농도로 나누었는지에 따라 적립률과 소진율이 달라지는, 함께 할 때면 계속 적립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점점 줄다가 언젠가는 사라지고 마는 그런 마일리지. 그런데 오늘 저 생뚱맞은 연락을 받고 보니 우정은 마일리지 같다는 비유가 모든 친구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더라도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더 적립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르고, 그만큼 애틋해지고, 그간 하지 않았던 쑥스러운 말도 아닌 척 툭 던질 수 있게 되는 그런 사이. 이런 이들이야 말로 마일리지에 구애받지 않는 VIP가 아닐까. 나이가 든다는 것은 VIP들과의 우정을 깊이 있게 숙성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VIP라니. 친구의 뜬금없는 메시지에 나까지 감성적이 되어 하마터면 “너도 나한테 정말 좋은 친구야 인마.”같은 오글거리는 답장을 보낼 뻔했다. 써뒀던 말을 얼른 지우고 다시 메시지를 입력했다. 조만간 한번 보자. 술 한 잔 해야지. 그저 그런 이와 할 말이 없을 때 나누는 그런 말이 아니라 정말로. 정말로 조만간 한번 보자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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