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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Nov 11. 2021

역지사지

머리로는 아는데 실천은 쉽지 않은

 내 오른쪽 눈이 떨리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부터였다. 처음엔 잠깐 이러다 말겠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눈의 떨림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저녁에 피곤할 무렵이 되면 그때서야 떨리곤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자고 일어나는 순간부터 떨리기도 했고, 이런 날이면 퇴근할 무렵에는 눈이 뻐근하게 아프기까지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증상을 말해보기도 했지만 답은 모두 같았다. "하우 아 유?"라 물으면 기계처럼 "아임 파인. 앤드 유?"라고 대답하듯, '눈이 떨린다.'는 말에는 모두가 '마그네슘'을 말했다. 아쉽게도 이미 마그네슘이 들어간 비타민은 먹고 있던 터라 이 대답들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이대로 있다가 괜히 큰 병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 병원을 가보기로 했다. 


 치과 같은 특유의 냄새나 소리가 없어서일까. 안과는 초등학교 때 눈병에 걸려 갔던 것 이후 처음이었지만 다행히 크게 떨리진 않았다. 잠깐의 대기 후에 들어간 진료실. 인자해 보이는 중년의 의사 선생님은 내 증상을 듣더니 준비된 기구에 머리를 올리게 했다.


"턱 올리시고 이마 대시고 눈을 크게 떠보세요. 위에 보시고 아래 보시고 눈을 꽉 감았다가 떠볼게요. 네 됐습니다. 이제 이마 떼시고. 표정을 확 구겼다가 다시 펴볼까요? 네 좋습니다. 이번엔 휘파람 한번 불어볼게요. 네 됐습니다. 근육에는 이상이 없어 보이네요. 스트레스성일 수도 있고 눈이 건조해서 그래요. 점안액 처방해 드릴 테니 가져가서 자주 넣으세요. 컴퓨터랑 핸드폰 적당히 보시구요."


  진료가 길어지면 그만큼 큰 병일지도 모르니 금방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대기시간보다 훨씬 짧았던 진료를 마치고 나온 내 손엔 스트레스성 눈 건조증의 치료를 위한 인공눈물 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 후로 한동안 인공눈물을 이용했지만 효과는 그리 극적이지 않았다. 넣는 동안에는 괜찮아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떨려서 어느 순간부터는 귀찮음에 인공눈물을 넣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부터 눈 떨림이 다시 심해지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갔던 병원은 결국 똑같은 이야기만 하고 말 것 같아서 이번엔 조금 멀리 있는 다른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이번에 간 병원은 지난번보다 규모가 더 큰 곳이었다. 대기 중인 환자도 더 많았고 의사의 진료 전에도 시력이나 안압 체크 같은 기본적인 검사를 하기도 했다. 이곳의 의사 선생님도 역시나 친절했다. 증상을 설명하고, 기구에 머리를 올리고 눈을 이리저리 검사. 뭔가 기구로 눌러보고 떼더니 다시 위아래를 쳐다보세요.

 

"혹시 커피나 술을 자주 드세요? 눈이 일반적인 분들보다 더 건조한 편이세요. 심한 건 아니니까 이런 식습관 같은 것만 잘 조절해도 증상이 나아지는 경우가 있어요. 컴퓨터나 핸드폰같이 계속 집중해서 뭘 보다 보면 눈이 더 금방 건조해져서 떨리거나 자고 일어나서도 자는 동안 눈이 건조해서 떨렸을 수 있고요. 우선 점안액 처방해 드릴 테니까 수시로 넣으시고, 점안액이랑 비슷하게 생긴 다른 치료제가 있는데 그건 3~4시간마다 한 번씩, 그리고 처방해드리는 다른 약은 자기 전에 눈에 넣고 주무세요. 심하면 신경 치료를 받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지금 보기엔 그리 심각하지 않으니 괜찮아질 것 같아요. 약 잘 넣으시고 2주 정도 후에 뵈시죠."


 이번 진료도 역시 대기 시간보다 짧게 금방 끝났다. 다만 이번엔 지난번에도 처방받았던 인공눈물 외에 새로 받은 약이 2개나 더 있었다. 넣어야 하는 약도 많아지고 약값도 더 나왔는데 어째서인지 마음은 이번이 더 편했다. 진료시간이 짧았던 것도, 눈이 떨리는 이유에 대한 진단 결과도 지난번과 같았다. 그런데 왜 오늘이 마음은 더 편했던 걸까. 그건 이번이 더 많은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내 눈이 왜 떨리는지, 이게 심각한 무슨 병인 것은 아닌지였다. 그런데 그 원인이 스트레스라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 아니던가! 원인이 스트레스라는 말은 내겐 마치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다 보니 이유를 모른 채 처방을 준 것 같고, 그 처방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컴퓨터나 핸드폰을 많이 보지 말라니. 그게 현대인에게 할 소린가 싶기도 하고.

 

 그러나 이번 진료에서는 이런 궁금함이 상대적으로 많이 해결되었다. '내 눈이 평균보다 더 건조한 편이고, 커피나 술을 많이 먹으면 그것 때문일 수도 있다. 컴퓨터나 핸드폰을 집중해서 보다 보면 더 쉽게 건조해진다.'는 말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말보다 훨씬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심할 경우에는 신경 치료라는 방법도 있지만 그리 심해 보이지 않으니 약만 꾸준히 잘 넣으면 괜찮아질 것이다.'는 말은 심각한 병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괜찮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해 주었다. 내 기분의 차이는 결국 이 설명의 차이 때문이었다.


 세상엔 머리로는 잘 알지만 실천하긴 어려운 것들이 참 많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다는 것도 그렇다. 특히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수록 더하다. 자신에겐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가 이것을 궁금해하는지 아니면 심각하게 여기는지 생각해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역지사지. 


 처음 간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 이 말을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고 그가 친절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내가 궁금한 것을 말해주지 않았고 내겐 심각한 고민거리였던 눈 떨림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그에 반해 두 번째 병원에서는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말해주었고, 내 눈 떨림이 심각하지 않아 충분히 고칠 수 있는 것으로 대해 주었다. 같은 진단을 받았음에도 나는 다시 병원을 가게 된다면 두 번째 병원으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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