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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Dec 23. 2021

대기업인데 스타트업처럼 일하라구요?

생각하는 톱니바퀴 (2)

 덩치가 큰 대기업에서는 하나의 사건에 얽혀 있는 사람도 많고 부서도 많다. 얽혀있는 이들끼리 이해관계도 서로 달라서 부딪히고 조율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속도감이 떨어지게 된다. 이 회사에 다닌 지도 제법 시간이 흘러 후배들 앞에서 라떼를 찾을 정도가 되었지만 이 점만큼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변화, 의사결정, 실행. 그 외의 많은 분야에서 대기업은 느리다.


 경영진도 이런 문제를 인지했는지 회사는 올 한 해 일하는 방식을 바꾸겠다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이 전담 조직까지 만들어 애자일 방식으로 일하는 문화를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조직은 현업 조직을 대상으로 애자일 방법론을 교육하고 그들이 실무를 애자일 방식으로 잘 진행할 수 있도록 가이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것뿐 아니라 최근에는 HR 부서에서도 "애자일 방식으로 일하는 부서에는 물적·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며 공공연하게 애자일 방식으로의 전화를 독려하고 있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회사의 의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자 하는 이런 시도는 우리 회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대기업에 다니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애자일 방식으로 일하기"라는 말이 "스타트업처럼 일하기"로 불리는 것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들 일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 열심히라고 한다.


 회사가 바라는 새로운 일하는 방식은 결국 조금 더 빠르게 움직여서 시장이나 고객의 변화에 보다 민첩하게 대응하자는 것이다. 빨리 실행하고 고객의 피드백을 받아서 그것을 (역시 빠르게)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는 것. 애자일 선언문만 봐도 그렇지만 방법론 자체는 좋고 훌륭하다.



 그러나 헤비급 선수가 갑자기 라이트급의 민첩함을 가질 수 없듯 방법론이 좋다고 해서 대기업이 하루아침에 스타트업처럼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직 문화를, 일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오랜 시간을 두고 일관되게 해 나가야 할 일이기 때문인데, 지나치게 속도를 내다보면 여기저기서 예상치 못한 문제점들이 생기곤 한다.


 얼마 전에 애자일 조직을 경험한 지인들과 만날 일이 있었다. 그들은 대기업에서 애자일 방식으로 일하며 각자가 겪은 어려움을 잔뜩 쏟아냈는데 아래는 그들이 말한 것들 중 일부이다.



1. 전사의 모든 조직이 애자일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일하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모든 조직이 같은 타이밍에 100%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일부 조직, 특정 서비스 또는 특정 업무 분야를 따로 선정해서 그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방식을 먼저 도입하고, 그 우수 사레를 전사로 전파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A의 회사는 서비스를 기획하는 부서와 개발을 수행하는 부서가 나뉜 곳이었는데 A가 속한 서비스 기획 업무 영역만 애자일 방식으로 운영되다 보니 서로의 일하는 방식이 달라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A는 중요한 기능부터 시작해 하나하나 만들어가며 고객의 반응을 보고자 했다. 그 반응을 보고 기획을 바꾸거나 고도화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개발 부서에서는 언제까지고 신기능을 추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변화하지 않을, 최종 버전의 full spec 기능 정의를 달라고 했단다. 애자일 방식과 워터폴 방식이 충돌하는 전형적인 케이스였던 셈인데 각자 나름의 논리가 있어 실무자들 간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한참의 논의 끝에 이 안건은 리더에게 올라가게 되었고 업무 진행 방식을 결정하는데만 한참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또한 A의 옆팀에서는 2달 정도의 기간 동안 서비스 기획을 해두었는데 막상 2개월 전에 요청했던 법무검토 결과가 '서비스 진행 불가'로 나와 그간 했던 일을 날렸다고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만 민첩하면 뭐하냐. 그런 데서 2~3달씩 걸리면 그냥 헛짓거리만 하다가 끝나는 거야."



2. 개발과 출시가 전부가 아니다.

 B는 오랜 기간 서비스 운영을 담당하는 운영팀에서 일해왔다. 운영팀에게는 서비스에 장애나 기타 이슈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비스 기획이나 개발 단계부터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 그가 속했던 애자일 팀에서는 이런 것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점이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운영할 때 예상되는 리스크는 중요도가 낮은 일이니 지금 고려하지 말고 당장 눈에 보이는, 동작하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고객에게 보이고 피드백을 받는 것에나 집중하라는, 그것이 애자일이라는 분위기.


"그렇게 엉성하고 급하게 만들어서 일단 출시를 한다 쳐. 리더들은 빨리 만들었다고 보고하고 칭찬받고 다른 부서로 가면 끝이지. 그런데 장애나 보안 이슈라도 터져봐. 결국 똥 치우는 건 실무자들이야."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니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결국 자신이 다 치우게 될 것이라면서 B는 한숨을 내쉬었다. 개발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다가 운영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DevOps라는 개념이 나온지도 오래되었는데 위에서 그런 건 아는지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3. 결국은 보고, 보고, 보고.

 애자일 방법론이 추구하는 것은 개발 → 고객의 피드백 → 의사결정 → 개발이라는 사이클을 빠르고 연속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결정권을 가진 이가 이 사이클을 운영하는 팀 밖에 있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대기업에서 의사결정권을 갖는 임원들은 밑에 여러 팀을 데리고 있다. 즉 여러 개의 애자일 팀이 운영되며 각각의 사이클을 돌리게 된다는 말인데 이렇다 보니 임원은 각 프로젝트에 멤버로 참여할 수도, 그렇다고 업무 내용을 모두 파악하고 있기도 어렵다. 임원들도 의사결정을 하려면 내용을 알아야 하므로 결국 실무자의 보고가 필요해진다.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빠른 보고가 필요하고 그만큼 보고는 많아진다. 애자일을 하면 할수록 보고만 많아지더라는 얘기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깊이 공감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결국 기존의 업무방식이나 조직문화가 새로운 방법론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간극을 좁혀나가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장애가 발생하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운영팀으로서는 일단 출시부터 하고 보자는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애자일 방식으로 출시한 서비스는 일정 단계가 될 때까지는 장애가 나더라도 정상참작을 해준다.' 같은 인사평가 방식의 변화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보고가 너무 많다는 문제를 줄이기 위해서는 프로젝트 리더에게 의사결정권이 더 많이 부여되어야겠지만 수직적인 관리체계로 돌아가는 대기업에서는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결국 새로운 일하는 방식이 잘 자리잡기 위해서는 이처럼 많은 부분에 대한 회사의 일관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날 모인 이들이 가장 크게 공감했던 이야기는 "기존 방식대로 일하는 사람은 다 느리고 답답한 사람 취급을 하더라."는 말이었다. 회사에서 전파하고자 하는 새로운 방식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언젠가는 분명 자리를 잡고 널리 전파될 것이다. 회사가 할 일은 직원들이 새 일하는 방식을 통해 성공을 경험하게 돕고 체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이 좋다는 것을 경험하고 스스로 변화하게 만들어야지 기존의 것을 나쁜 것으로 만들어 억지로 바뀌게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관성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새로운 방식이 좋다면 그것을 잘 적용하고 전파하면 그뿐.  대기업에서 대기업처럼 일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게 만들어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스타트업 회사들이 시작될 때부터 품고 있던 DNA라는 것은 대기업에서 갖자고 말로만 떠들거나 누가 시킨다고 해서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런 외침보다 중요한 것은 스타트업과 같은 DNA가 싹틀 수 있도록 인프라와 분위기를 먼저 만드는 것이다.



 ps. 스타트업에 있다가 대기업으로 이직한 지인 C는 애자일 팀을 경험한 후기를 이렇게 남겼다. "스타트업처럼 일하기 싫어서 대기업 왔는데 왜 자꾸 스타트업처럼 일하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아니 그리고 왜 자꾸 애자일 방식으로 일하다가 성공하면 분사시켜주겠다는 말을 대단한 보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거야? 기껏 안정적이고 싶어서 대기업 들어온 건데 또 나가라는 거야?"

 그의 말은 이 날 두 번째로 많은 공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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