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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Dec 30. 2021

귤은 괜찮아

 나는 귤을 좋아한다.

 몹시, 무척, 매우, 정말, 진짜.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될 정도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딱히 없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일상인 무색무취형 인간인 내게 귤은 스스로 나서서 의사를 표현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주제 중 하나다.


 귤은 좋다.

 일단 맛이 좋고 껍질을 까기 전에 몇 번 주물렀을 때 말랑해지는 느낌도 좋다. 오렌지나 다른 봉 시리즈와 달리 껍질을 까기 편해서 좋고 껍질 안쪽의 하얀 부분인 귤락을 뜯는 재미도 좋다. 한 조각씩 뜯어가며 먹어도 좋고 세 조각을 한 번에 먹거나 절반을, 또는 한 알 전체를 한입에 넣고 먹을 때의 맛이 다 다른 것도 좋다. 무엇이 좋은 이유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열거해가며 말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몇 없다. 내게 있어 귤과 정 반대 포지션에 있는 오이가 싫은 이유는 '그냥'이라는 말로 끝이다.


 귤을 처음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는 당연히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남아있는 기억의 첫 자락부터 귤은 나의 좋아하는 것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나는 베란다에 있는 귤을 박스째로 가져와 TV 앞에서 다 까먹은 전적도 있는, 겨울이면 귤 때문에 손발이 노래질 정도로 귤을 좋아하던 아이였다. 그랬던 내가 귤을 특별히 더 좋아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겪었던 일 때문이다.


 5학년 겨울. 당시 나는 뇌수막염에 걸려서 크게 아팠다.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고 뭐만 들어갔다 하면 다 토해낼 정도였으니까. 살면서 가장 아팠던 때를 꼽으라면 그때였을 것이다.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었는데, 의사 선생님은 며칠 더 지켜보고 차도가 없으면 큰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어린 내게 큰 수술이란 곧 큰 아픔이라는 말과 다름없었기에 환자였던 나도, 환자의 보호자였던 엄마도 침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지만 뭐라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한 엄마는 내게 먹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귤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밥도, 물도, 이온음료도 넘기지 못했던 어린 나는 어찌어찌 귤을 먹어냈고 놀랍게도 다음날부터 증세가 호전되어 금방 완쾌했다. 이쯤 되니 뇌수막염이 맞긴 했는지, 귤 덕분이 아니라 엄마의 정성스러운 간호 덕분이거나 그냥 나을 때가 되어서 나은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그날 이후 내게 귤은 아픈 병마저도 낫게 해 준 절대 선(善)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귤의 일 섭취 적정량이 2~3개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성인 기준 하루 비타민 권장량은 100mg인데 평균적으로 귤 100g에는 44mg의 비타민이 들어있어 하루 2~3개 정도가 적정량이라는 것이었다. 한번 먹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먹어대던 내겐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귤을 신나게 먹다가 손톱 밑이 노래지고 발바닥이 노래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귤을 많이 먹고 난 뒤에 양치질을 하다가 이가 시릴 때도 그랬고 하루 만에 잔뜩 쌓인 귤껍질을 볼 때도 그랬다. 내겐 여전히 절대 선과 다름없는 좋은 과일이지만 적당히 먹어야겠구나. 마음 한편 어딘가에서 스스로도 찔렸던 모양이다.


 과유불급. 지나친 것은 모자람과 같다는 말이 이처럼 아쉬울 때가 있을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제해 가면서 적정량만 해야 하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쁜 일은 죄책감이 든다거나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지만 좋은 일은 그런 것도 없어서 적정량만 하기가 더 어렵다. 내겐 귤이 그렇다. 아침에 두 개를 먹었으니 오늘은 이제 그만 먹어야 하는 걸까? 심지어 비타민 약도 챙겨 먹었으니 사실은 그 두 개도 먹지 말았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귤을 보면서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너무 슬프고 우울한 일이다. 그럴 때면 나는 하루 적정량이 몇 개라는 말은 무시하고 다음 귤을 집어 든다. '귤이니까 괜찮을 거야. 나랑 귤은 특별한 사이니까.'따위의 근거 없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껍질을 깐 귤을 맛있게 씹는다. 정도가 없이 무한정해도 좋은, 그런 것이 세상에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래, 귤은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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