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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영환 Aug 16. 2018

② 이름 없는 공간에 모인 사람들

공간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이제는 이름도 생소한 티스토리 블로그가 없어져버려서,
싸이월드에서 간신히 사진 몇 장을 찾았다.


이름없는 공간이기에, 매번 메세지가 바뀌었다. 이건 새학기가 시작하는 봄에 걸었던 문구. (오글주의)
나중에는 게시판을 통해 공모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손글씨로 썼다...

얼핏 요즘 핫한 을지로 카페들처럼...

‘노네임’이란 공간은 이름에 걸맞게  간판이 따로 없었고, 칠판 페인트가 칠해진 액자에 매번 그때그때 우리가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분필로 적어 놓는 게 다였다. 그러다 보니 아무나 찾아오기보다는 상당 수준의 호기심이 있어야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그 호기심 어린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지인으로 구축된 밀도 높은 네트워크가 초창기 우리 공간의 주 멤버가 되었다.


우리는 일종의 오프라인 허브 기능을 했고, 다양한 사람들의 연결을 통해서 수많은 전시, 공연, 세미나 등이 알아서 열리도록 했다.


몇몇 대학의 예술전공 학생들이 졸업요건으로 갤러리에서 전시를 해야만 했는데, 갤러리는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에 우리 공간을 통째로 빌려주기도 했고, 이름 없는 밴드나 싱어송라이터들에게 언제나 노래할 수 있는 무대를 내어주었다.
지역의 기업들과 연계해서 사회공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예를 들면, KT&G와의 협업으로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 씨와 함께하는 토크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을 여러번 개최했다.


임진모 평론가와 함께했던 대중음악사. (폰화질이 시대상을 반영한다)
어느 회화과의 졸업 전시 오픈 파티


우리는 17세기 프랑스의 살롱(Salon) 같은 복합문화공간을 추구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독특한 카페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손님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변화하는 정체성에 맞게 함께 시작한 친구는 커피를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우리가 직접 로스팅까지 하면서 카페 시스템을 만들어갔다. (이 경험으로 현재 그 친구는 신세계 인터내셔널에서 스타벅스를 담당하고 있다.)


사업이 안정화되던 와중에 우리는 재미있는 실험을 하나 시작했다. ‘객식구’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객식구는 객(客)은 객인데 식구인 멤버로, 처음엔 손님으로 왔지만 우리와 친해지게 된 식구 같은 단골들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보통 이들은 처음에는 누군가의 소개로 우리 공간에 찾아오게 되는 손님이었지만,
어느 순간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본인과 마주하게 된다.


이후, 우리는 객식구들에게 사업의 중요한 몇 가지 만을 가르쳐 주고, 그 외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는 최대한 권한을 부여해서 자유롭게 운영하도록 했다. 누구나 카페 사장이 될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해준 것이다. 신기한 것은 오히려 그 일일 사장의 지인들 덕분에 매출이 늘어나고 우리에게는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권한과 책임을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울 수 있었다. 그들에겐 돈보다는 경험이 중요했고, 우리는 이 커뮤니티 덕분에 함께 성장하고 점점 더 다양한 시도들을 할 수 있었다.


얼떨결에 신메뉴를 개발하는 객식구
얼떨결에 재능기부하는 객식구
얼떨결에 파티하는 객식구


이렇게 이야기하면 마치 공룡이 살던 시대 이야기 같지만
우리가 사업을 시작하고 정확히 1년 뒤인,
2009년 11월, 아이폰이 국내에 첫 출시되었다.  


그러면서 우리 공간에도 두 가지 변화가 생겼는데,

첫째는 셀카를 찍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들이 트위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선, 우리 공간의 모든 조명을 셀카가 잘 나오는 조명으로 교체했다. 덕분에 셀카 잘 나오는 카페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주문한 뒤 셀카만 찍고 나가는 사람들도  많아지면서 덩달아 테이블 회전율도 높아졌다.

이후 우리 공간에서 가장 늘어난 모임이 바로 아이폰 스터디 모임이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아이폰을 스터디하던 시절이 있었다. 매번 새로운 어플이 출시될 때마다 그 어플을 학습하고 테스트하기 위한 다양한 모임이 만들어졌다.


인스타 문화의 시초라고 봐야하나...
첫 트위터 모임과 태어나서 처음 애플 아이패드를 마주하는 순간


우리 공간이 학생들의 공간에서 다양한 연령대가 공존하는 곳으로 바뀌는 데에는 트위터가 한 몫했다.

당시 트위터에는 해시태그를 이용해 뒤에 ‘당‘을 붙인 수많은 그룹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면, #커피좋아한당 #대전당 #맛집격파당 과 같은 식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대전당 이란 이름으로 모인 대전에서 트위터를 하는 사람들의 오프라인 모임 장소로 주로 우리 공간이 사용되었다.

급기야 트위터로 모인 사람들이 2010년 지방선거에서 공동으로 온라인 선거운동까지 시작하면서 우리의 활동영역이 전시, 공연 같은 문화 프로그램에서부터 선거에 이르는 정치활동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확대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지역사회’라는 단어를 인식하게 된 것 같다.
그 당시 우리 커뮤니티의 많은 친구들이 그러했듯, 내가 살고 있는 지역(오프라인)을 재인식하게 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트위터(온라인) 였다.

온라인으로 연결된 일면식 없는 사람들을 직접 마주하고 나이와 관계없이 공동의 관심사와 동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지역사회와 연결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인용하자면,
스물세 살의 우리는 온라인 마을에서 다양한 어른들을 만나 지역에서 새롭게 배우고 재성장 했다.


이제는,

공간을 만드는 것보다도 그 공간이 어떤 사람들로 채워지고 어떻게 함께 숨 쉴 것인가에 대해서 더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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