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2021년 8월, 카자흐스탄에서 홍범도가 돌아왔다.
(한겨레 신문, 2021.08.18, https://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1008149.html)
고등학교 과정의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1920년대 국외 독립운동이라는 주제의 첫머리는 봉오동·청산리 전투다. 두 전투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이번 글의 주인공인 홍범도 장군이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두 전투는 매우 상징적이어서, 홍범도 역시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어 왔다. 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더라도 영화를 좋아하시는 독자라면,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를 통해서 그의 이름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홍범도를 언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홍범도를 독립운동사에서 지우고 싶어 했고, 또 누군가는 홍범도의 경력을 문제 삼았다. 최근 홍범도의 유해 봉환과 관련하여 그의 경력을 문제 삼은 사설과 논평이 그 증거다. 도대체 무엇이 홍범도를 논란에 휘말리게 한 것일까? 홍범도를 향한 부정 평가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러한 논란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홍범도는 을미의병에서 처음 등장한다. 1895년, 일본은 경복궁에 낭인을 보내 명성왕후 민 씨를 살해한다(을미사변). 이러한 일본의 태도에 분노한 사람들은 지역별로 의병을 조직하여 무력투쟁을 시작했다. 의병 규합은 대체로 유생이나 관료 출신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평민 출신 의병장도 큰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평양 출신으로 함경도 북청에서 사냥꾼과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한 홍범도의 첫 등장이었다. 이후 홍범도는 북청·갑산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친일 단체 '일진회' 회원을 척살하고, 일본군 부대와 유격전(게릴라전)을 지휘했다. 부대원은 적었지만, 사냥 경력으로 다져진 우월한 기동성을 내세워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후 홍범도 부대는 연해주로 넘어갔고, 두만강을 건너 수시로 국내 습격 작전을 전개했다. 연해주에는 이미 한인 사회가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이 지역에서 1918년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이동휘와 긴밀해졌고, 홍범도는 한인사회당 부흥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해에서 통합된 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지명되었다. 이동휘는 무장투쟁의 끈을 놓지 못했다. 그는 간도와 연해주에 있는 모든 무장투쟁 단체를 통합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이어가기 위해 홍범도에게 북간도로 가서 통합을 주도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이유로 홍범도는 북간도로 떠났다.
홍범도는 여기에서 자신의 부대인 대한독립군과 대한국민회 등 다른 부대들과도 연합하여 국내 습격 작전을 이어갔다. 1920년 6월 3일, 계속해서 작전을 이어나가던 연합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받기 시작했고 삼둔자와 후안산에서 교전을 벌였다. 이후 6월 7일, 일본군 추격대는 독립군을 따라 으슥한 산골짜기로 들어왔다. 이때 미리 봉오동 고지를 선점한 홍범도와 연합부대는 일제히 사격을 가하며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봉오동 전투의 큰 성과였다.
타격을 받은 일본군은 추격대가 아닌 대규모 군대를 출병시키고 싶은 마음이 불타올랐다. 그런데 간도는 중국 영토이므로 명분이 없는 상태에서는 출병이 불가능했다. 일본군은 명분을 직접 만들었다. 이른바 '훈춘사건'이 그것이다. 마적단을 매수해서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했고, 일본 영사관 등의 보호를 목적으로 출병할 수 있었다.
대규모로 넘어온 일본군을 피해 홍범도와 연합부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김좌진, 이범석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 부대도 이 방향으로 대규모 군대를 움직였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독립군과 일본군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청산리 백운평→척후벽→완류구→어랑촌→고동하를 거치며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혀 혼란에 빠트렸다. 청산리전투*의 의의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여러 전투가 묶인 개념은 ‘전역'이라는 표현이 있으므로 원래는 '청산리전역'이 더 부합한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열불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초토화 작전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간도에서 독립군처럼 생긴 사람들은 모두 잡아 죽이고, 마을은 불태워버렸다. 경신년 간도 참변의 시작이었다. 독립군들은 이제 간도를 벗어나야만 했다.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러시아였다.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해주에는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갈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일본과 러시아의 완충지대였던 극동공화국 자유시(스보보드니)를 향해 떠났다.
그런데 자유시의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한인 부대의 통합을 두고 이면에서 극동공화국 측의 사할린부대와 코민테른 측의 자유대대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이면에는 러시아의 권력 구조와 한국인이 만든 두 개의 공산당 파벌 싸움이 있었다(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분석해보려고 함). 간도에서 온 홍범도와 독립군들은 역경을 헤치고 온 러시아에서 또 다른 역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홍범도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는 소련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자유대대가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홍범도의 예상대로 자유대대가 통합의 주도권을 잡았다. 반면 사할린부대는 통합 찬성하지 않고 반발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사할린부대는 자유대대의 무장해제 지시를 거부했고, 자유대대는 공격까지 감행하며 제압하는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다. 홍범도는 동포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이러한 참혹한 상황을 목격하며 땅을 치고 울었다고 전해진다.
이 비극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홍범도에게는 지울 수 없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다. 자유대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고려혁명군정의회에서는 이 사건을 의회 산하의 법원에서 처리하도록 넘겼다. 법원에서는 이 문제를 심리할 재판 위원을 뽑았다. 여기서 홍범도가 과거 러시아 빨치산과의 연계 작전을 한 경력을 인정받아 재판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동포를 심판해야 하는 홍범도의 심정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하지만 위원으로 활동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 되어버렸다. 이 경력 때문에 홍범도는 1923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사할린부대 출신인 한인 2명의 폭행으로 앞니 2개가 부러지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로 홍범도는 소련 공산당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는 레닌과 단독 면담을 진행했고, 이 면담에서 권총 한 자루를 선물로 받았다.**이후, 1927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여 정식 당원이 되었다. 홍범도는 공산당원으로서 무슨 대단한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연해주 지역에 있는 한 집단농장에서 한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살았고, 이후 1937년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
**이 권총으로 앞서 자신을 폭행한 두 사람을 쏘아 감옥에 갔으나, 레닌 찬스로 석방될 수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자유시 참변에서의 역할과 공산당 가입 전력으로 홍범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대전 현충원 안장과 건국훈장 추서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과연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1963년 대통령 박정희가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약산 김원봉과는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1945년 이전에 공산당 활동 전력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서훈 대상에서 제외해야 하는가? 홍범도를 평가하고자 한다면, 이 질문부터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2021년의 논란이 불거지기 이전부터 홍범도의 자질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이자 국방장관 출신인 철기 이범석이다. 이범석은 홍범도가 러시아에서 활동한 일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오히려 청산리전투에서 보여준 홍범도의 역할을 문제 삼았다.
최근까지도 '청산리대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전투에 '대첩'이라는 수식어는 1592년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처럼 괄목할만한 성과를 냈을 때 붙이기 마련이다. 청산리전투는 그 의의는 크다고 볼 수 있지만, 대첩이라고 할만한 성과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 전투가 대첩이 되려면, 독립군이 만주에서 다시는 일본군이 발을 못 붙이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독립군 부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만주를 떠나 러시아로 이동했다.
청산리대첩으로 불린 시점은 이범석이 1941년 중국에서 회고록을 출간하면서였다. 이 책에서 이범석은 전투의 성과를 김좌진과 본인에게 돌리고, 본인이 더욱 돋보이도록 서술했다. 해방 이후 국무총리에 취임한 후에는 청산리 기념식을 성대하게 열기도 했다. 아무래도 전과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다. 반면, 이 책에서는 홍범도에 관한 언급은 존재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렇게 홍범도 없는 청산리전투가 정설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이 설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미군이 압수한 일본군 문서를 바탕으로 발간된 책 『간도출병사』에서는 청산리전투에서 다음처럼 서술했다.
"홍범도가 이끄는 부대는 최후까지 싸웠고, 이로 인해 일본군이 먼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범석은 자서전 『우둥불』을 통해 재차 반박했다.
"홍범도는 우리를 돕지 않고 도망갔고, 결국 일본군에 의해 떼죽임을 당했다. … 청산리전투 직후 일본군이 노획한 무기 사진을 찍었다. 그 무기는 홍범도 부대의 무기다."
이번에는 홍범도의 존재는 인정했으나 공적을 부정했다. 과연 이범석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이렇듯 홍범도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논란의 중심에 서있었다. 1940년대부터는 이범석이 청산리전투에서 보여준 이범석의 자질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에는 여러 연구를 통해 독립운동의 공로가 인정되기 시작했으나, 과거의 활동을 이념이라는 잣대를 통해 해석하면서 또 논란을 낳았다. 이러한 홍범도를 둘러싼 논란은 김원봉과 비교해볼 만하다. 두 인물이 문재인 정부에 의해서 다시 소환되었다는 점, 이념과 독립운동의 공로가 충돌한다는 점이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논란은 평가에서 시작된다. 평가할 입장을 정하면서부터 충돌이 생기고, 몇 가지 근거가 뒷받침되면 논란은 더욱 커질 수 있다. 그렇게 한쪽 입장만 고집하다 보면, 상대방의 주장은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쪽에서 하는 말은 무조건 거짓말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쉽고 자연스럽다. 매우 쉬워서 쉽게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이 과정이 계속되면 놓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아깝다. 많은 정보를 찾는 것은 복잡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질문이 만들어지고 답을 찾는 시간을 갖는다. 이 과정이 매우 소중하다. 찬성도 반대도 아닌 중간에 서서 이러한 문제를 바라보는 시도를 계속해보면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는 중도파가 가진 시각을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과연 그 사람들은 답을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