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혐오'로 몸살 앓는 세계
WATCH FOR ICE
구글(Google)에 이 문구를 검색하면, 표지판 뒤로 북극곰이 얼음에 미끄러져 뒤로 자빠지는 사진이 나온다. 캐나다는 이렇게 도로 곳곳에 빙판길 주의 표지판을 설치한다. 얼음 결정도 크게 그려 넣었다. 그도 그럴 것이, 캐나다 북부는 1월 평균 기온이 -26.8℃다. ‘얼음 공화국’에서 얼음을 조심하라는 말은 당연하다.
최근 미국은 온라인에서 이 표지판과 문구를 수입했다. 자세히 보면, 문구는 같은데, 그림이 다르다. 육각형 결정이 아닌 사람을 바닥에 눕히고 두손을 묶어 체포하는 모습이다. 아하, ‘ICE’는 미국에서 ‘이민세관단속국’을 뜻한다. ‘이들이 갑자기 체포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으로 변형한 것이다.
재치 있는 감각에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하다. 얼마 전, ICE가 조지아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합작공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 수백명을 체포한 기억이 떠오른다. 이뿐만 아니다. 올해 3월에는 미국 정부가 유학생 비자를 줄줄이 취소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하버드대학교에 “유학생 비율을 절반으로 줄이라”고 압박했다.
경제 문제이면서 외국인 혐오 문제다. 트럼프 주장대로 미국이 다시 위대해지려면, 미국인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내쫓고 미국인이 그 자리를 꿰차야 한다. 그렇다면 슬로베니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패션모델 일을 하면서, 백인 부자 남성과 결혼한 멜라니아 트럼프도 검문·체포 대상인가? 돈 많기로 유명한 남아공 출신 일론 머스크도 마찬가지인가? 허무맹랑한 논리는 이민자가 미국 경제를 뒷받침해 온 역사를 잊으려는 ‘자기 위로’에 불과하다.
한국 사정은 어떨까? 공권력이 강제 집행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크게 다르지 않다. 며칠 전, 중국인 무비자 입국이 시작되자 국민의힘은 혐오 발언 수위를 높였다. 김민수 최고위원은 “대규모 입국으로 전염병이 확산하고, 범죄 피해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며 “인적이 드문 곳을 이용할 때는 삼삼오오 짝을 이뤄 이동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같은 당 나경원 국회의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중국인 무비자 입국과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를 엮어 “철저한 대책을 마련하기 전까지 입국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과 관계를 입증하지 않은 ‘막말’이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다문화’를 내세워 필리핀 출신 이자스민 씨에게 비례대표 공천을 준 정당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이들만 탓할 수는 없다. 1992년 UN난민협약에 가입한 한국은 2012년에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했다. 그 위상과 걸맞지 않게, 난민 인정률은 최근 5년 동안 1.3% 수준에 그친다. 100명 가운데 1명만 인정받을 수 있다. 20%를 웃도는 미국·영국의 1/10에도 못 미친다. 하늘에서 별을 따야하는 수준이다. 세계 곳곳에 한국인 재외동포가 700만명 넘는데도, 이민자에 관한 인식은 처참한 수준이다.
사람은 움직인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더는 먹을 게 없을 때 정처 없이 떠돌았다. 국가가 생긴 뒤에는 무거운 세금과 폭정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몰래 이동했다. 산업 사회에서도 농민은 도시로 이주해 노동자가 되었고, 종교·정치 등 다양한 이유로 억압받은 사람들이 신대륙을 찾아 떠났다. 수천년 동안 국적과 관계없이 동고동락해왔는데, ‘세계화 시대’에 이제 와서 서로 밀어낼 이유가 무엇인가?
다양성을 망가뜨리면 생태계가 무너진다. 1840년대 아일랜드는 ‘감자 마름병’으로 감자 생산량이 폭락하자 1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병균에 저항성을 가진 품종이 없어서 발생한 비극이다.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다. 근친혼으로 가족 관계를 이어간 합스부르크 왕가는 결국 부정교합 등 갖가지 유전병으로 대가 끊겼다. 세상의 이치가 이런데, 민주주의라고 다를까?
안팎으로 혼란한 시대에 시민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일부 미디어와 정치 세력이 외국인에게 씌운 혐오 프레임(Frame)부터 깨부숴야 한다. 한쪽 주장에 빠진 언론과 커뮤니티를 멀리하고,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본질을 찾으려고 노력하자. 증오에서 벗어나야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WATCH FOR H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