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곳
나는 내 속마음 터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는다. 꽉 막힌 내 사고방식이 진솔함을 원치 않는 것 같다. 한 번은 상황과 감정에 휩쓸려 타인에게 나를 드러낸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터 놓고 보니 뒤늦게 그런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상대방의 그 동정 어린 눈빛 보다 내 약점을 스스로 말했다는 것에 감정 하나 바로 잡지 못하고 결국 상대와 멀어지기를 택했다.
참 소심하고 그릇 작다. 뭐든지 잘하고 싶어 하지 않았나 나는?
이따금씩 도움 받을 사람도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부족한 사회성 덕에 도와주고 싶다가도 질려 버리겠다. 솔직히 진실로 도움 받고 싶지는 않다. 내가 어디 잘난 구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움 받는 것을 못 받아들일 정도로 마음을 못 연다. 열 생각이 있기는 한가. 이 고집 때문에 손절한 사람들만 몇 트럭이 될 것이다.
오로지 가족들과 진솔한 대화를 자주 해왔다. 인생관부터 진로, 지인들의 이야기, 내 전공과는 동 떨어진 발명품 아이디어와 가게 이야기까지 그럼에도 나는 타인보다 가족들에게 듣는 것이 더 좋다. 당연히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대학 나온 지성인들보다 말을 더 조리 있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식의 출처도, 이야기의 흐름도 일관되거나 논리적이지 않아도 열성을 다해 나에게 하나라도 더 도움이 될 것 같은 말들을 해준다. 단지 내가 느끼는 감정의 색깔을 단순히 푸르고 온화하다는 느낌으로 표현하기에는 아쉬울 것 같다. 그런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는 건 그 색이 곁들여진 이들의 두 눈 빛이기 때문이다.
가족들도 내 덜떨어진 사회성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다 본인들의 짧은 배움과 가정환경을 미안해하며 내게 못 해주는 것만을 생각하는 게 매우 화가 날 뿐이다. 사실 나도 내 마음의 문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고집 부리는 원인을 곰곰히 생각 해보니 나는 그저 이들이 쌓은 지난날들의 경험을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이 이유였다. 당신의 인생은 고생했고 참 잘 견뎌왔다는 것을 내가 대신하고 싶은데, 잘나고 갖춰진 타인의 삶의 빛깔보다 이들의 시간을 내가 더욱 더 찬란하고 환하게 비춰주고 싶은 소망이다.
그러나 이제는 가족들이 이런 내가 누구랑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가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것만은 나도 백날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마음에 문제가 있는 인간을 누가 만나고 싶어 할까. 나의 가족이 소중한 만큼 상대방 가족도 소중한 건 마찬가지다. 내 마음속에서 새로이 가족으로 여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도 결국 내 아버지 어머니와 똑같게 흘러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