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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이작가 Dec 23. 2020

내 동생

새벽 3시에 '그냥' 전화했단다 

시드니 시간 오전 5시, 한국 시간 새벽 3시에 엄마의 핸드폰으로 한국의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카톡의 벨소리가 평화롭게 잠을 자던 아침을 깨운다. 전화받기 망설이다가 맘을 한번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동생이었다. "뭔 일 있어? 엄마는?" 그랬더니 동생이 "별일 없어. 그냥 어제 퇴원을 해서"라며 멋쩍었는지 "오빠 자고 있었지?"라며 끊는다. 


"몇 시인데 전화하냐"라고 짜증을 냈지만 엄마한테 별 일없다니 너무 다행이다는 생각이 든다. 몇 달 전 새벽에 걸려온 전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화기 너머로 들었다. 코로나로 한국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이제 고향집에서 전화가 오면 그리고 엄마가 약간 몸이 안 좋다고 하면 맘이 안절부절 너무 쪼그라든다. 


새벽 3시에 전화해놓고 "그냥"이라니 

이것을 그냥 ~    

동생은 그냥 전화했다고 한다. 


동생은 나랑 두 살 터울이다. 누나, 나, 여동생 다들 두 살 터울이다. 어릴 때는 난 누나랑 누나의 친구들이랑 잘 어울려 놀았던 것 같다. 누나랑 학원도 같이 다니고 누나 친구형들이랑 잡기 놀이도 하고 밤에는 부루마블 게임도 했었다. 그때 동생은 어디에 있었지? 동생의 기억으로는 어릴 때 형제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동생은 밖으로 나돌아 다녔고 내성적이고 부끄럼 많은 나와는 달리 동생은 키도 크고 외향적인 성격에 항상 주위에 친구가 많았던 것 같다. 


내가 한창 오락실에 빠져있을 때 국민학교 2학년쯤인가 50원짜리 오락을 하는데 나는 돈이 없어서 다른 애 어깨너머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나 말고도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오락을 하고 있는 친구를 부러워하며 등 뒤에서 기웃거리던 애들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때 동생이 50원짜리를 손에 흔들며 "이거 누구 줄까?" 하길래 일제히 오락 구경하던 아이들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당연히 혈육인 나를 줄 주 알았는데 잠시 고민하더니 다른 남자애를 주는 것이었다. 아주 충격적이었다.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을 보면. 애는 가족보다 이성을 더 좋아하나 보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티격태격하면서 생일선물로 줬던 문구세트를 싸운 뒤에는 다시 뺏어오는 일은 몇 번이나 했다. 나도 뺏기도 했으니 몇 번이 아니라 몇 년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동생의 친구가 나한테 달려와서는 동생이 그네 타다가 다른 상급생이랑 싸워서 운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운동장을 한 걸음에 달려가서 그 상급생을 때려눕혀 주웠다.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했고 키는 작아도 씨름은 큰 애들도 다 눕힐 정도로 내성적인 성격과는 달리 싸움은 잘했다. 뿌듯했다. 내가 이길만한 애랑 시비가 붙어서 내가 쉽게 이겼다. 또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생이랑 일산해수욕장 고모집에 갔다가 돈이 없어서 버스를 못 타고 걸어오는데 동생이 다리 아프다고 해서 업어준 기억도 있다. 


국민학교가 지나고 중학생이 될 쯤에는 우린 다들 공부에 취미가 있어서 나도 전교 10 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했고 동생도 전교 50등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나는 남자 고등학교 중에 성적이 가장 높은 학성고등학교, 동생은 김태희가 나왔다는 울산여고를 들어갔다. 동생 학교 축제 때도 놀러 가고 동생의 친구들도 몇 명 알고 같이 콘서트도 가고 나름 의좋은 남매처럼 지냈다. 종종 옥상에서 정신 교육한다면서 얻드려 벋쳐해 놓고 몽둥이질도 했고 풀어준다며 맥주 한잔하며 우리 잘하자며 다독이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난 서울로 대학 가고 군대 갔고 동생은 대학을 자퇴하고 아르바이트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울산시내의 문구점에서 일하고 겨울엔 붕어빵 장사도 했다. 아빠도 막내 여동생을 아주 이뻐해서 리어카도 만들어주고 끝날 때는 리어카를 끌고 오신곤 하셨다. 막무가내로 자퇴하고 가출도 하고 했지만 이제 사춘기를 겪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는 동생은 2002년 호주로 떠났고 멜버른에서 호주 남자 친구 만나서 영어도 잘하고 잘 살고 있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있었다. 나도 일 년 뒤 2003년 골드코스트로 유학을 갔고 2004년 한국 부모님과 누나, 매형, 돌 지난 조카가 골드코스트로 놀러 왔다. 멜버른에 있던 동생도 골드코스트로 와서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동생이 이상했다. 아주 짧은 치마에 옷차림도 이상했고, 매형이 목사인데 돌 지난 조카한테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했고, 나의 친구들에게 내 험담을 하고, 오랜만에 함께 있어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불편했다. 너무 외국생활에 젖어서 그런가 보다고 했지 그게 병이라 알게 된 건 일 년 뒤쯤 이였다.


난 골드코스트에서 유학생활 마치고 시드니로 내려와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중에 멜버른의 종합병원 간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동생이 양극성 장애로 병원에 입원 중이고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때 알게 된 것이 동생은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한국 교민 가정에 셰어를 하며 살았는데 외계인이 자신의 머리에 칩을 심어서 감시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교민의 애기로는 며칠간 방안에만 있기도 했고 결국 맨몸으로 거리를 뛰어다니다가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또 남자 친구랑 살면서 애기가 생겼고 낙태를 두 번 하면서 더욱 극적으로 변했고 남자 친구와 다투고 가족들도 싫어해서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멜버른의 병원에서 입원하면서 전기충격 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면서 조금 안정을 찾아서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가기 전에도 사건들이 있었다. 그래도 한국 가기 전에 시드니 관광을 시켜주고 싶었지만 시드니 왔다가 몇 시간 만에 사리지고, 헤어진 남자 친구 보고 싶다며 멜버른으로 가다가 공항에서 돈이 없어서 연락이 오고, 기행을 종 잡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건들이 인생의 먼지에 파묻혔고 여하튼 2005년에 동생이 한국에 돌아왔다. 부모님이 정신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조현병이라는 병명을 받게 되었고 입원하여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약 먹고 좀 쉬면 괜찮겠지라며 했던 세월이 벌써 15년이나 지났다. 그사이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정말로 더욱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 여동생이 퇴원을 하고 새벽 3시에 '그냥' 전화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냥'이라는 말속에 너무 많은 것이 들어있음을 말이다. 


'병원에 갇혀 지내면서 너무 힘들었다. 

나도 다른 아가씨들처럼 예쁜 옷도 입고 화장도 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아기도 낳고 사랑하는 남편이랑 부모한테 효도하면서 좋은 엄마로 딸로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성격도 좋고, 착하고, 날씬하니 키도 크고, 그런 아이인데 몸 쓸 맘의 병이 걸려서 너무 불쌍하다. 한때는 막 나가는 동생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우리 고모도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는 것을 생각하면 가족력이 있나 싶기도 하고 나 대신 동생이 그 병을 갖고 사는 것 같아 미안하다. 


내 오토바이 뒤에 타고 울산 바닷바람에 머리 날리던 시절도 기억 날 것이고, 동생이 병원에 있을 때 제일 좋아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맘도 많이 아플 것이고, 멀리 외국에 사는 오빠가 그리워서 전화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전화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 짜증으로 답을 했다. 

그리고는 지금 눈물 흘리며 글을 쓰고 있다. 

나 역시 나중에 동생에게 전화하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전화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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