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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이작가 Aug 04. 2021

백일사진

100일부터 잘 생겼네

아빠 돌아가시고 삼일을 우시더만 나흘째부터는 친구들이랑 여행도 가고 재밌게 살 거라시던 우리 엄마, 한말영 여사가 이제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없어서 돌아다닐 수가 없다고 한다. 엄마는 어린 시절 핸드볼 경상북도 대표로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앞에서 경례하고 전국체전에 참가했던 시절의 메달을 보물처럼 장롱 깊숙이 숨겨놓는 분이신데 말이다. 차라리 코로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놀러 못 다니니 다행이라고 한다.


최근에 아빠 사진도 버리고 싶다며 사진첩 정리하다가 나의 백일사진이라고 찍어 카톡으로 보내줬다. 사진이 색깔도 바래지 않고 306 가디건이 없다면 세월이 보이질 않아서 신기하다. 내가 77년생이니 벌써 40년이 넘은 사진이고 내 아들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이다.   


장남에 장손인 내가 태어났을 때 가을걷이하시던 할아버지가 얼마나 기뻤는지 낫을 하늘로 던지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오셨다고 한다. 남자를 귀하게 여기던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음은 두 말하면 잔소리이고 더 말하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이다. 게다가 내가 할아버지의 완전 붕어빵이다. 담배연기 가득한 경로당 문을 삐꼼 열고 얼굴을 삐죽 들이대면 뉘 집 손자인지 금방 알아채신다.


할아버지는 낫으로 고구마도 깎아주고 탁사(탁주:사이다=1:1)를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시기도 했다. 몇 숟가락 졸라서 받아먹고 논두렁에서 헤롱헤롱 비틀거리다가 도랑으로 빠져 어른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단다. 그 후로 주전자 심부름을 하면서 손에 삐져나온 탁주를 쭉쭉 빨아먹으며 그 오묘한 맛에 눈을 떴다.  


내가 몇 살 때일까? 경운기 핸들을 잡으면 발이 브레이크에 닿을랑 말랑 할 정도였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볏짚을 높이 쌓아 놓으면 기어올라가 꼭대기에 누웠다. 침대가 없던 시절이니 내 인생 최고로 푹신한 매트리스인셈이다. 볏단에 파묻혀 숨바꼭질도 하고 잘린 볏단 뿌리만 총총히 박힌 마른논으로 훌쩍 뛰어내려 잠자리도 잡았다. 나른해지면 하늘을 보며 양인지 솜사탕같은 구름을 찾기도 했다. 마른 볏짚은 얼굴을 간질거리면서도 코로는 구수한 냄새가 났다.  


밥을 하려고 나무를 태우는 할머니 옆에 쭈그리고 앉아 볏짚으로 하나씩 태우면 어찌나 빨리 빨갛게 달아오르다가 하얀 재로 변하던지. 회초리를 다 불살라버리고 싸리빗자루도 태워보고 얼굴이 홍시처럼 익어간다. 옷에 불냄새 그득해지면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하시니 더욱 신나 두꺼워서 혼자 들지도 못하는 솜이불 안으로 헤집고 다녔다.  


얇은 창호지 틈새로 달빛이 비치고 바람이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면 방금 본 전설의 고향 속의 하얀 소복 입은 귀신이 나올 것 같다. 외양간 옆에는 변소에는 갈 엄두도 안 난다. 요강을 마루에 갖다 주는 할머니한테 방문을 열어 놓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엉덩이가 더 차가워지기 전에 서둘러 바지를 추켜올린다.  


킁킁! 나무 타는 불냄새를 맡고 싶고 씁씁! 달콤하고 시원한 홍시를 흡입하고 싶다. 꽃이 피고 있는 산소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립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흑흑! 미안한 마음이 그리움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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