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치산과 토벌대의 발자취
교정을 봐야 할 글이 있어서 도서관에 왔다. 2층 자료실은 다 차서 3층으로 올라갔더니 몇 군데 비어 있었다. 하얀 칸막이와 민트색 벽이 정갈한 병원을 연상시키는 곳. 적막한 오후 시간만큼이나 띄엄띄엄 사람들이 앉아 있다. 거의 젊은이들이었다.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 잡았다. 나 이외에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공간을 확보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시계를 앞에 놓고 5시까지 교정을 봤다. 올해 4.3 평화문학상(논픽션 부문) 받은 글인데, 가을에 책으로 내기 위해서 은행나무 출판사 디렉터를 만나 편집 방향에 대한 의논을 하고 형식을 좀 손보기로 했다. 부록으로 올린 글은 빼도 무방하지 싶었는데 편집자는 같이 싣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했다. 빼도 좋겠다는 말보다는 듣기 좋았지만 그 수고로움이 더해져 일주일째 원고만 들고 다니고 있었다. 쓸 때의 나름 절절했던 감정이 사그라지고 다시 들여다보고픈 욕구가 좀체 일지 않았다. 쓸 때는 그분 영전에 바치는 경건한 마음이었는데.
작품 부록으로 첨부하여 정리한 인터뷰 자료는 1927년 전북 임실군 청운면에서 나고 자란 여성 빨치산 박선애 씨의 기록이다. 이 분을 신혼 여행길에서 만나 증언 인터뷰를 진행했었다. 뒤늦게 글을 정리하면서 묵은 편지를 뒤져보니 30년 전 그분께 받은 연하장이 나왔다. 아기 탄생 소식을 기다린다는 말씀이 있었다.
박선애 씨는 25세부터 수감 생활하였고 15년 형기를 마치고 42세에 첫아기를 낳았다. 그 딸이 6살 때 재수감되어 딸은 여동생 호적으로 올려 동생이 키웠다. 동생 박순애 씨도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잡혀 수감생활을 했는데 복막염이 걸려 병보석으로 나온 상태였다. 동생은 이 병의 후유증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더욱 내 아기의 탄생을 기다린 것이리라. 나는 서른둘에 첫 애를 낳았다.
박선애 씨 자매는 통일운동가로 평생을 살다 10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이다. 통일운동에 온 인생을 바치다 사라져 간 내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그 대표가 될 만한 이 분들의 삶과 뜻을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초심으로 돌아가 원고를 들여다본다.
올해는 다른 사람 글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썼다. 5월까지만 읽고 6월부터는 내 글 쓴다고 했는데 가뭇없이 6월이 가고 7월에도 결국 다른 이들 글을 붙잡고 있다. 이제는 옛날과 달리 목표를 잡고서도 꼭 이루어야 한다는 마음이 부족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가다 보면 뭔가 이루겠지 하는 느긋한 심정을 갖게 된 것도 나이가 주는 축복이라면 축복이다. 그동안 얼마나 애면글면 나를 볶아왔던가.
이번 기회에 나는 빨치산을 토벌했던 사람들의 생각도 알고 싶었다. 찾아보니 그 당시 회문산 빨치산을 토벌했던 경찰의 이야기, “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가 있었다. 그분은 40세가 되기 전에 금강에 빠져서 맥없이 돌아갔다. 공주경찰서 서장으로 있던 아버지와 같이 수영을 즐겼던 12살 소년은 가라앉은 아버지를 19시간 20분 지나 시체로 만났다. 아들은 금강을 건널 수도 있는 수영실력을 가진 아버지가 왜 빠졌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 수기는 아버지 사후에 아들이 쓴 것이다. 전투일지, 작전기록 등 아버지 유품을 모두 소각시켜버린 어머니를 아들은 빨치산과 그 유족의 보복이 두려웠을 거라고 짐작한다. 개밥그릇으로 남긴 아버지 철모가 이삿짐 옮기다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오열하는 어머니를 보며 아들은 그 소리가 역사의 소리로 들렸다고 했다. 아들은 생전의 아버지와 관련된 사람과 장소들을 10여 년 찾아다니며 “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를 완성했다. 그 아들은 법대를 중퇴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영의 매개자’가 되었다. 그는 영혼을 불러서 달래는 초혼 위령제를 잘해서 명성이 높았다.
무공훈장 속에 죽음의 냄새가 풍기듯 토벌대장이라는 말속에는 수많은 억울한 죽음이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전쟁의 논리는 여성인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비정한 긴장의 세계다. 살다 보면 불가해한 일들이 좀 많은가. 나 또한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우리는 삶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생각-가치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 누가 전쟁을 원했는가. 몇몇 지도자 또는 권력자의 이기심 때문에? 지금 드는 생각은 그런 흐름을 만든 권력자나 자본가 같이 센 집단의 힘이 개개인의 머리 위에서 거래를 주고받으며 전쟁도 불사하는 것 같다.
차일혁 아들은 작은 인연을 크게 만드는 것도 부자가 되는 비결이라는 했다. “작은 인연을 소중히 하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며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피천득의 글에서) 사는 삶 속에 또 다른 풍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코로나 확산으로 7월에 예정된 4.3 평화인권 강의를 비롯 모든 수업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소식은 내게 희비를 준다. 월 수입이 제로인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뜻과 토막 나지 않은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이 기회에 글을 좀 쓸 수 있으려나, 모든 상황은 내게 새로운 기회가 된다.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니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인가? 그래도 이 순간 행복하다. 과도한 욕심 없이 있는 것을 닦고 조이며 고치고 사는데 익숙한 남편으로 내 삶의 한축이 안정감을 주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는 나이, 이 나이가 참 좋다. 그리고 모르는 게 정말 많다는 것도 내 삶을 충전시킨다.
햇빛이 세포 깊숙이 박히는 여름, 더구나 올해 같은 더위에서 우리 집에서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되는 과일이 수박이다. 나를 뺀 가족들이 엄청 좋아해서(난 참외가 더 좋다) 일주일에 한 번 제일 큰 수박을 사게 된다. 수박을 자를 때마다 나는 찬탄을 금치 못한다. 여름의 메마른 땅 어디에 수분을 간직하고 저렇게 채워주는지 씨가 담고 있을 무궁무진한 수분 DNA가 놀랍고 신기한 것이다. 어떤 원리로 땅의 수분을 끌어올려 달고 풍부한 과즙을 만들어내는지 생명과학을 전공한 딸에게 물어보면 쉽게 답이 나오겠지만 적당히 모르는 것이 나의 수박 예찬에 이로울 것이다.
요즘 실속 있게 하는 일은 없지만 시간이 여유로운 것은 5년여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와 당분간 연락을 않기로 한 사정도 포함된다. 메시지가 오면 답을 해얄 것 같고 내가 글을 보내면 즉각 답하던 글 친구, 어쩌다 답이 늦어지면 신경 쓰였던 시간에서 해방된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글을 처음 봐주는 독자여서 어쩌면 나는 소설가인 그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글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6월 이후 한 편도 안 쓴 것을 보면. 사실 친구의 애정 어린 평이 글을 쓰게 만드는 동력과 위로는 되었지만 내 근원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나 또한 친구에게 마찬가지였으리라. 우리는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한 편으로는 모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 시각 이후의 나는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며 더덕구이를 요구하는 막내딸을 위해 도서관을 나가는 대로 더덕구이에 시간을 바쳐야 한다. 더덕은 껍질 벗기기가 공이 들어 안 먹는 쪽을 택하는 식재료 중 하나인데 오늘 같은 날은 해 바쳐야 한다. 막내는 성장과정에서 언니에게 사랑을 뺏겼노라고 가끔 나를 시험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성격이 무던해서 신경을 덜 썼던 것인데 누구에게나 받아야 할 애정의 총량이 있는 것 같다. 늘 언니 것만 새것으로 사다가 초등 2~3학년 때인가, 레이스 달린 우산을 두 개 사서 하나씩 안겼을 때 기뻐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우는 아기 먼저 젖 준다는 말처럼 막내는 징징거리는 적이 없었다. 그렇게 슬쩍 넘어간 시간들에 막내딸은 어마 무시한 이자를 붙이며 가끔 청구서를 내놓아 나를 놀래 킨다.
아라뱃길의 노을
이 시간 거리에 나서면 내 고향 제주에서는 황홀한 노을이 하늘 가득 채울 것이다. 제주에 살 때 노을 쫓아 동네 아이들하고 와 와~ 떠들며 이모가 사는 먼 동네까지 간 적이 있었다. 노을은 볼 때마다 새롭고 한 번도 같은 모양 같은 빛깔인 적이 없었다. 인천으로 이사 와서 아라뱃길 위로 펼쳐지는 노을을 종종 본다, 서울 생활 5년째 한 번도 제대로 못 보던 노을이.
더덕구이, 더덕구이, 귀갓길에 잊지 말고 사가야지. 근데 국산 참기름이 아니라서 맛이 되려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