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샤갈

- 고향의 노래

by 양경인

예술가들에게 고향의 의미는 각별하여 작품세계에 깊은 영향을 준다. 수화 김환기(1913-1974)의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기좌도)이다. 그의 달 항아리며 푸른색의 다양한 변주는 바다에서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광경을 보며 자란 유년시절이 바탕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이중섭이 소도, 박수근의 소박한 인물 군상도 그들의 고향과 연관되어 있다.

김환기 <여름 달밤, 기좌도> 캔버스에 유채, 1961

마르크 샤갈(1887-1985)은 리투아니아계 유대인으로 폴란드 국경지대 벨로루시의 비데프스크가 고향이다. 소련 해체 후 지금은 벨라루스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샤갈이 성장한 제정 러시아 때는 6만 5천 인구에 절반이 유대인 마을이었다. 음악과 연극이 발달하고 철도의 교차로 지역이라 상업이 발달된 마을에서 샤갈은 1910년까지 성장했다. 이들의 종교는 "하시디즘'으로 동물에게도 사람의 영혼이 깃든다는 유대교다. 비테프스크는 18세기 초 이래로 하시디즘 유대교의 보루였다. 이런 종교의 전통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샤갈의 작품 전면에 반영되어 있다.

샤갈의 가족(1908년 경)

샤갈의 아버지는 청어 도매상의 점원이었고 어머니도 잡화상을 운영했다. 할아버지는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백정으로 취급되던 도살업(푸줏간 주인)에 종사했다. 누나와 여동생이 6명, 샤갈은 3형제의 맏아들이었다. 부모님 모두 경제활동을 하여 샤갈은 바이올린을 배우고 노래 교습도 받을 수 있었다. 미술을 만나기 전까지는 무용가, 바이올린 연주가나 성악가를 꿈꾸었다고 한다.

9남매를 키우면서 유대인 가정답게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는 뇌물을 써서 유대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공립학교에서 샤갈을 공부시켰다. 어머니를 비롯한 사진 속 여성들의 표정이 무척 당당한 것도 눈에 띄는 점이다. 어머니는 맏아들에게 “ 너는 사무원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지만 유대교 화가에게 데려가 그림 욕구의 활로를 열어주었다. 샤갈의 19세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샤갈은 본능적으로 이 화가의 방식은 자신과 맞지 않다고 느꼈다고 한다. 이후 샤갈은 러시아 최고의 문화도시 상뜨 페테르부르크에 유학했다. 이것이 샤갈의 첫 고향 탈출이었다. 그는 집안의 힘든 노동과 동족 중심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이디시어(유대인 언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제국 미술학교에서 전체 성적은 시원찮았다. 그곳의 교육방식과 내용도 맞지 않아 샤갈은 고향에 다시 돌아왔다가 변호사 후원자를 만나 24세에 파리로 건너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기하였다. 기하에 관한 한 내가 최고였다. 선, 각, 세모, 네모 등은 나를 환희로 몰아넣었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면 나는 왕자가 없는 왕이었다”

- 샤갈의 자서전 중에서


1971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초연 후 영화로 만들어진 " 지붕 위의 바이올린 " 포스터


1971년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은 샤갈의 고향 풍경과 생활모습이 잘 드러난 영화다. 이 영화는 1964년 뮤지컬이 먼저 무대에 올랐는데, "지붕 위의 바이올린" 뮤지컬의 제목 자체가 애초에 샤갈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된 것이라 한다.

20대에 이 영화를 처음 보았다. 지붕 위에서 연주하는 위태로운 바이올린 선율이 유태인의 운명을 예시한다고 이해했던 것 같다.

1900년 초 우크라이나 지방 유대인 마을이 배경인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우유가공업자 '테비에'다. 그는 다섯 딸들과 함께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러나 다섯 딸들이 하나 둘 그가 원하지 않는 남자들과 결혼을 하는 중 마을에도 러시아 혁명의 보이지 않는 영향이 퍼지기 시작한다. 영화는 유대교와 러시아 정교회의 종교문제, 구세대와 신세대의 대립, 유대민족과 러시아 거주 국민의 이념적 갈등을 드러낸다. 아버지의 세계에 머물 수 없는 딸들이 부모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부모 속을 썩이는 테비에 딸 나이였지만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보니 테비에 아내 처지가 되어 있다. 계획대로 안 되는 인생 속에서 비애를 삼키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가장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마음을 젖게 했다.

노을을 배경으로 위태로운 바이올린의 선율. 세계 바이얼리니스트 1/3이 유대인이라고라고 할 만큼 유랑의 역사와 운명을 가진 유대인에게 바이올린은 이동하기에 편리한 악기이다. 이 영화에서 위태롭게 흐느끼는 바이올린 선율은 아이작 스턴의 연주다. 그도 유대인이다.

우리나라에도 전통 현악기 해금이 있다. 해금도 원래는 요하 지방 유목민 사이에서 생겨났는데 고려시대에 유입되어 주로 궁중에서 연주되었다. 그런데 일반에게는 ’ 깡깡이’ 정도로 인식되어 민족 전통악기로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이제 우리나라 경제력이 높아지면서 해금 연주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 지인의 결혼식에서 들었던 해금 연주는 유순하면서도 깊은 음색이 서양 현악기 못잖은 감동을 주었다.

유랑하는 민족은 몇 개의 조국을 품고 살아간다. 샤갈도 그러했다. 집시들은 죽을 때 관에 모국의 국기와 거주했던 마지막 나라의 국기를 덮는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집시는 거의 주변부 삶으로 밀려나고 비슷한 운명을 가진 유대인들은 그들의 약점을 긍정 에너지로 바꿔 지금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 죽은 남자> 1908년 경, 캔버스에 유채, 68.2*86, 파리 퐁피듀 센터 국립현대미술관

<죽은 남자>는 영화의 장면이 떠오르는 그림이다. 6개의 촛불 안에 누워있는 관 속의 남자 위에서 진혼곡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고 , 거리 청소부가 산자를 밀어내는 저승사자 역할을 하고 있다. 땅 위에 누운 검은빛 시신, 전체적으로 불길하고 음산한 장면이다. 샤갈은 자서전에서 삼촌이 구두 수선공처럼 바이올린을 연주했다고 하는데 지붕에 걸쳐놓은 장화 한 짝이 연주가의 직업을 말해준다.

우리 전통 유교 장례식에 상여 노래가 일반적이었다면 샤갈의 고향 비프스테크에는 바이올린 장송곡이 민족음악이었다. 샤갈은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이런 어두운 색조의 그림을 그렸는데 고향을 떠나게 된 이후의 색채감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 후 샤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떠났고 이후 러시아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러시아식 결혼식, 1909, 캔버스에 유화, 68*97, 취리히, 뷔를레 컬렉션

토요일마다 노이히 삼촌은 예배용 웃옷을 걸치고 어떤 구절이든 상관없이 큰 소리로 성경을 읽었다. 그는 마치 구두수선공처럼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꿈을 꾸곤 했다. 빗방울과 손자국들로 더러운 창문 앞에서 아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동안, 도살꾼이고 상인이고 성가대 지휘자이기도 한 늙은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에 잠겼는가는 오직 렘브란트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샤갈의 자서전 중에서

일상생활의 위대함을 주제로 한 이 그림의 사람들은 샤갈 고향마을의 가난한 유대인이다. 그림을 보면서 내 유년시절 결혼 풍속도가 떠올랐다. 동네 친지들이 3일 간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았던 할머니 집 잔치는 정낭(*대문 대신 가로 걸쳐 놓은 길고 굵직한 나무)이 치워지고 동백꽃으로 장식한 커다란 아치가 세워지면서 3일 동안 치러졌다. 친지들은 쌀 부조를 주로 했지만 수도가 없던 시절이라 가난한 집은 물 부조로 대신하였다. 잔치집에 쓰는 물을 대기 위해 허벅(*배는 불룩하고 아가리는 좁은 물동이)을 등에 지고 잔칫집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 여성들 뒤로는 아이들이 서넛 달려 있었고 그 아이들은 잔치 마당 주변에서 놀다가 시장끼가 나면 수시로 나들며 밥을 먹었다. 검은 돌담으로 이어진 긴 올레길로 면사포를 쓴 신부가 걸어 들어올 때 동백꽃 아치 대문 옆에 모여 바라보는 이웃 친지들. 유년 시절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잔칫날 빠질 수 없는 장면이 취객의 싸움질인데 <러시아식 결혼식> 맨 뒤에서 시비가 붙은 검은 외투 남자는 동백꽃 아치 옆에 널브러진 육촌 아저씨 모습 같다.


<나와 마을>, 1911, 캔버스에 유화, 192.1*151.4, 뉴욕 현대미술관


그의 유대교 식 이름은 ‘모이세 샤갈’이었지만 1910년 프랑스에 와서 마르크 샤갈로 바꿨다. 프랑스의 예술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던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곳에서는 상트 페데스부르크에서처럼 유대인 주거 허가증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의 이런 종교적 자유가 부러웠다. 그러나 파리에서 야수파의 색채와 입체파의 평면을 실험해보았지만 유년기를 보낸 비테프스크로 돌아왔다. 유대인들의 돔 교회당, 꼬불꼬불한 거리, 청어 가게 점원이었던 아버지의 삶 속에서 샤갈은 성장한 것이다.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자신의 정서 뿌리에 맞게 변화시키며 샤갈은 <나와 마을>을 완성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이 그림 때문에 샤갈이 비호감 화가였다. 색감은 낯설었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그로데스크 하게 느껴졌다. 샤갈의 작품을 특징짓는 초현실주의 이미지는 하시디즘 유대교의 문화적, 종교적 유산이었다. 이제는 염소의 눈이 마음 깊숙이 들어온다. 염소는 샤갈에게 고향을 의미한다. 고향의 기억들을 장면으로 묶어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인간과 동등하게 묘사된 <나와 마을>은 하시드파 유대인이던 화가 자신의 내적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보석에서 발산하는 듯한 다양한 색의 면과 면 사이에 눈가루처럼 뿌려진 실버 화이트. 그림, 중앙의 올리브빛 열매들도 눈가루 면사포를 쓰고 있다. 비췻빛 얼굴을 한 남자의 새하얀 동공과 갈증에 허옇게 마른 입술, 그는 염소와 연인처럼 같은 목걸이를 하고 있다. 이 둘의 관계는 교감하는 시선과 서로의 눈동자를 연결하는 실선, 그리고 분할된 면들 속에 그려진 몇몇 에피소드로 표현된다. 염소 머리 부분을 등분으로 나누고 중앙에는 젖을 짜는 여성, 교회에서 나오는 여성의 하회탈 같은 얼굴, 뒤집어진 집 두 채와 거꾸로 선 여인의 모습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집과 사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샤갈은 말년에 짐마차를 끌며 생활비를 벌던 아버지가 바퀴에 눌려 세상을 떠날 때나 어머니 부고에도 집에 가지 못했다. 소비에트 혁명이 변화시킨 조국이 화가에게는 고향 상실로 이어졌다. 부서진 다리를 고치는 일이 그림을 가르치는 일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었던 혁명 조국의 사정들. 왼쪽 아래에서는 월식이 진행되어 그믐달이 되고 있다. 샤갈 그림에는 해 달이 합쳐지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 하늘을 나는 소와 염소는 유대 문학이 그런 이미지로 가득하다.


샤갈의 독특함은 문자 친화적 환경에서 언어적 영역을 시작적 영역으로 바꿔놓은 데 있다.

-"샤갈" (모니카 봄-두첸, 남경태 옮김, 한길아트 ) 중에서

그는 유대민족이 갖고 있는 위대한 신비에 전위예술의 자유를 투사하고자 했으며, 동부 유럽의 유대 문화 전통을 보편적인 시각언어로 재해석하려고 한 사람이었다. 그의 문화적 세계는 자신이 경험한 문화 예술적 전통들에 대한 관계에 절대적 순응이 깔려있다.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캠버스에 담아놓은 기법은 샤갈 그림의 특징인데, 샤갈은 이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과 더불어 뿌리에 대한 무한한 긍지를 가졌을 것 같다. 내가 샤갈의 그림에 뒤늦게 끌리는 것도 내 유년에 대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춘수의 시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은 이 그림을 보고 쓴 시다. 전체를 아우르는 흰색은 시인에게 한겨울의 눈을 연상하게 한 것 같다. 샤갈의 흰색은 화가의 의도대로 상상할 기회를 시인에게 제공한 셈이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1922-2004)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샤갈의 예술은 많은 부분 무의식에 근거하고 있으며 작품에 드러난 시적 이미지는 무의식 정신활동을 포착하여 상징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보인다. 샤갈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유대민족 공통의 집단 무의식 세계가 있을 것이다. 꿈속 세계에서는 우리도 동물과 대화가 가능하니까. 샤갈의 염소는 우리식으로 하면 소 같은 것. 소는 조상을 뜻하기도 하고 농촌에서 사람 노역의 몇 배를 하는 귀한 일꾼이었다. 우리나라 남쪽 끝 해남에서 자란 김남주 시인은 소를 이렇게 노래했다.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소가 병이 나면 어성교로 약을 사러 간다

읍내로 수의사 부르러 간다 허둥지둥 몸 둘 바를 몰랐으되

횟배를 앓으며 내가 죽을 상을 쓰면 건성으로 한 마디 뱉을 뿐이었다

"거시기 쿼드라 거 뒤꼍에 가서

감나무 뿌리나 한 두 개 캐다가 델여 먹여"

- 김남주 시 <아버지, 우리 아버지> 중에서

샤갈의 그림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녹아있다. 러시아 변방에서 하시디즘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우상을 금하는 관습을 무시했고, 코즈모폴리턴의 문화적 가치에 관심이 높은 부르주아 사회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마르크 샤갈, 그는 전 생애에 걸쳐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면서 다양한 세계를 연결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고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전의 경험 세계에 대한 해석자다. 동시에 전위적 새로움을 수용하는 데는 철저히 개인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인생의 격동기를 어느 정도 보낸 내게로 와서 색의 무한한 경이로움의 세계를 알게 해 준다.

광활한 무의식의 세계를 누에의 비단실처럼 뽑아낼 수 있었던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 마르크 샤갈, 그는 97세까지 살았다.

만년의 샤갈


샤갈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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