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곡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서다. “토지” 속의 연곡사는 탱화를 그리는 혜관 스님과 길상이라는 사내 아이가 불목하니로 자란 곳이다. 아니 그보다 ‘김개주’가 죽은 남편 불공을 간 최참판 댁 윤 씨 마님을 겁탈하여 낳은 ‘구천이’를 키운 절이다. 김개주는 연곡사 주지 우관스님의 동생이고 동학의 접주였다. 이렇게 작가는 조선 말기 민족종교로 출발하여 구한말의 혁명세력으로 조정을 뒤흔들었던 동학의 존재를 알리면서 동시에 보편적 인간의 고뇌를 문학적으로 구현하였다. 이런 연곡사가 실재로 있고 더구나 그곳에 우리나라 최고의 부도가 있다니! 자동차 내비게이션으로 연곡사의 주소가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017번지’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만 같았다.
연곡사로 들어가는 피아골 골짜기에는 섬진강이 길게 누워있고 왼쪽 산비탈에는 계단 모양의 논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었다. 과중된 토지세를 피해 지리산 골짜기까지 흘러들어 마지막 보루처럼 지상의 양식을 구하였을 저 다랑이 논들. 한 뼘이라도 넓히려는 농부의 의지는 손바닥만한 논들을 곡예를 부리듯 바깥으로 경사지게 했다.
피아골 골짜기의 내력이나 다랑이 논의 간곡한 사연들을 생각하며 숙연해진 내 기분은 일주문을 건축물을 매표소 정도로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한참 올라가 피아골 골짜기 깊숙이 들어가도 절 입구를 찾지 못해 다시 내려와 보니 예의 건물 옆에 연곡사 일주문이라고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갑자기 그곳에 낯선 솟을대문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인상을 받은 것은 내가 연곡사에 대한 이러저러 상념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구례 연곡사 일주문
기록에 의하면 연곡사는 호남 의병의 항일활동 본거지였다가 일본군의 진압과정에서 일부 불탔다. 그후 한국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폐사되었다.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빨치산의 본거지였던 지리산 일대를 진압하기 위해 국군 수도사단은 연곡사와 일대 여러 마을들을 차례로 불태웠다. 외적의 침략 속에 불타 없어진 수많은 문화재들은 차치하고라도 동족끼리의 전쟁으로 무참히 사라진 문화재를 맞닥뜨리는 일은 고통스럽다.
지금의 연곡사는 1983년도에 건립한 것이다. 그래서 화려하고 생경한 일주문 단청을 볼 수밖에 없었다. 햇빛에 형광색처럼 번쩍이는 저런 색감도 세월이 지나면 목조건축물에 스며들 수 있을까. 연곡사 일주문은 “토지”의 무대는 작가가 만든 소설 속의 공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넌지시 가르쳐주었다.
약수터 근처로 모여드는 친구와 가족 일행을 뒤로하고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 뒤뜰로 '동부도'를 보러 갔다. 난 연곡사에서의 시간을 동부도를 보는 데 온전히 쓰고 싶었다. 통일신라 870년 경으로 추정하는 동부도는 천년을 넘게 그 자리 그대로이다. 재질이 돌(하강암)이어서 한국전쟁의 화마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근처에는 고려 초에 세운 현각 선사 비와 현각 선사 생전에 세운 삼층석탑, 북부도, 서부도도 있었지만 내 눈은 온통 동부도를 떠나지 못했다.
구례 연곡사 동부도
연곡사 동부도는 우선 안정된 구도로 나를 깊숙이 끌어당겼다. 균형 잡힌 탑의 몸돌에 새겨진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들은 세월의 마모를 겪지 않았는지 선명하였다. 영성의 새가릉빈가를 탑의 지붕 위에 얹혀 지상의 육신이 새처럼 날아갔음을 보여주었고 그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볍게 해 주었다.
낙엽을 밟으며 동부도 주위를 빙빙 돌다가 아트막하게 쌓인 돌무덤 위로 올라서 보니 부채 살처럼 퍼지며 날렵하고 유연하게 올라간 옥개석의 지붕돌 무늬가 정교하였다. 낙엽더미 위에 납작 누워 우러러보면 처마 깊숙한 곳에는 도솔천에서나 봄직한 구름이 끼어 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읽었던 '신라인들은 돌을 콩고물과 팥고물 다루듯 했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부도는 큰스님의 사리를 묻은 탑이다. 천년 세월을 침묵으로 다져진 큰 스님의 죽음은 자연이 주는 고운 곡선으로만 빚은 듯 한없는 부드러움으로, 부도의 크기도 딱 알맞은 적절함으로 거기 있었다. 이런 부도를 안치할 만한 절의 내력과 규모를 가늠해 보았다. 그 부도 속에 있는 스님의 사리가 누구인지는 이미 내 관심을 떠났다. 한 스님의 죽음을 영원으로 형상화시킨 한 조각가의 예술혼, 천 년을 사이에 둔 이 교감이 내겐 더 소중했다.
동부도와 동부도 비의 위치(사진 하늘사랑)
동부도 바로 몇 발자국 거리에는 거북의 등에 올려진 '동부도 비(碑)'가 있었다. 탑신은 부서져 없어지고, 비석을 등에 지고 있던 귀부(龜趺)와 이수(跜首)가 남아 부도 비의 면목을 지키고 있었다. 동부도 비는 코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거북 몸체에는 날개가 붙어있어 좀 괴기한 모습이었다. 한 바퀴 둘러보다가 거북의 꼬리 쪽에서 걸음이 멈춰졌다.
동부도 비 귀부와 이수 (사진 하늘사랑)
내가 살아있는 거북을 본 적이 있었을까. 아마 자라나 남생이 정도 보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나는 동부도 비에서 비로소 거북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불거진 등뼈는 살아 꿈틀거리듯 선명하고 살짝 옆으로 휘어든 꼬리는 바다에서 모래 벌로 금방 올라온 듯 촉촉한 질감을 주었다. 머리 부분의 용과 구름 형상과 거북의 등 좌우에 붙은 날개가 영물의 신비를 나타냈다면, 뒷부분에서는 살아있는 거북의 생동감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었다.
어스름이 깔리고 재촉하는 일행에 합류하며 피아골 계곡을 빠져나오는 동안 다시 만나는 다랑이 논은 가을걷이의 수고를 마치고 노을빛에 잠겨 있었다. 노을이 지는 이 시간이면 절 입구 느티나무에 나와 통곡을 했다는 어느 스님을 떠올려본다. 나도 그런 일몰의 시간이 못 견디게 슬프고 허망했던 적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저녁밥이 익어가는 시간이건만 그 시간대에서 나는 인생의 적막, 덧없음, 슬픔 등의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연곡사 동부도는 또 다른 아름다움의 화두, 완벽한 아름다움이란 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죽은 자의 호사가 무슨 소용일까. 저토록 삶 자체가 고단하고, 애달프고, 숙연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