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 넘어가는 소리

by 양경인



지금 우리 동네는 논물대기가 한창이다. 모내기 준비로 1년에 두 번 한강에서 방류되는 물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물꼬를 자기 논에 대기 위해 벌어졌던 싸움 이야기는 우리나라 근현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요 주제다. 동학농민운동도 가렴주구의 수탈이 누적되어 있는 중, 군수가 만석보라는 저수지 물세를 무리하게 걷는 과정에서 촉발된 사건이다.


물꼬에서 나온 물이 졸졸졸 논으로 들어가고 있다.


농부는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고, 젖먹이를 둔 엄마는 아기 목에 젖 넘어가는 소리가 가장 듣기 좋다. 아무렴, 엄마 부푼 젖을 아기가 잇몸으로 담쏙 물고 꼴깍꼴깍 넘길 때, 그 순간 세상 아무것도 부럽지 않고 가슴이 뻐근했던 기억이 내게도 있었다.

둘째는 젖을 만 두 돌, 그러니까 24개월까지 먹었다. 돌잔치 넘어서부터 젖을 떼어보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아기의 고집 앞에서 속수무책, 우유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젖을 찾았다.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 이후 난 둘째의 고집을 이겨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을 하직하고 하느님 앞에 불려 나가 " 너는 지상에서 무얼 하다 왔느냐"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엄마 노릇을 하다 왔습니다 “ 할 것이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 지인들로부터 '야만인'이란 소리를 들어가며 2년 동안 젖을 먹였습니다”라고 뻐기면서 대답할 것이다.

젖을 먹이느라 백일쯤에 기회가 왔던 나름 좋은 직장을 포기했고 , 백일장에서 받은 4박 5일 동남아 여행권을 신혼인 여동생 부부에게 양도했으며, 독후감 상으로 나온 7박 8일 러시아 문학여행도 못 갔다. 일행들과 시베리아 길을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젖먹이는 여인(1893-4), 41.2*32.5 ,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르느와르의 그림 중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젖 먹이는 그림들이다. 아기가 젖을 어떤 포즈로 먹는지 화가는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했다. 연분홍 내리닫이 옷을 입은 저 아기는 백일이 될까 말까 한 젖먹이다. 약간 고단한 표정의 엄마 얼굴도 아기를 키워 본 사람이면 수긍이 될 것이다. 백일까지 키우는 데는 온갖 조바심과 수면부족으로 엄마 얼굴이 핼쑥해지는 때다.


르느와르 < 젖 먹이는 엄마>,1885-6, 개인 소장


젖먹이는 엄마 그림 중에서 내가 모델이어도 손색없을 만큼 매우 사실적이다. 우리 아기도 그림 속 아기처럼 한 손으로 오동통한 자기 발을 만지거나 한쪽 젖을 만지면서 암팡지게 젖을 빨아댔다. 수유기간에는 내 몸이 아기 식량이어서 국을 두 그릇 먹으며 수시로 배를 채워놓아야 했고 감기라도 걸리는 일이 없어야 했다.

산 밑으로 뚫은 물꼬에서 콸괄괄 물이 나온다.


팽팽히 차오른 젖무덤에 아기가 머리를 묻어 두 빰을 시큰거리면 들깍들깍 젖 물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기가 명주 올 같은 머리털을 흠뻑 적시며 버겁게 젖을 빨다가 잠시 쉬고 나를 쳐다볼 때면 두 혼이 만나는 희열을 느꼈더랬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아기에게 온갖 언약을 하게 된다. '너를 위해 엄마는 정직하고 옳은 일만 하며 살겠노라'라고.

물꼬에서 나와 도로를 흘러 논으로 가는 물


처음에는 경제적인 문제로, 다음에는 환경생태의 문제점이 한창 드러날 때라 어수선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무책임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지나고 보니 머리로 하는 관념적 고민이었다. 이웃집 담장 너머 왁자한 아이들 소리가 듣기 좋을 때 나는 아이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고 결혼 3년째 되었을 즈음 아이를 가졌다.

한 때 내가 여성임을 한탄하며 자학한 적이 종종 있었다. 아기 낳고 키우며 그런 콤플렉스는 사라졌다. 오히려 내가 여성으로 태어나 생명의 담지자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뿌듯했다. 동시에 내 몸이 한없이 소중해졌다. 두 아이 젖을 먹이는 4년 동안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평소 잠이 많아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다고 놀림감이 되었던 내가 아기가 뒤척이는 소리에도 깨었다. 그런 나를 보고 친정어머니는 " 아기 낳더니 그 무겁던 꽝(뼈)이 갑자기 가벼워졌다"라고 놀렸다.

'젖 유모'란 말이 있다. 남의 아기 젖 먹인다는 말인데 그럼 그 엄마는 자기 자식 젖은 어떻게 했을까. 젖이 풍부한 사람인가. 대부분 자기 자식은 대충 먹여야만 했던 살림이 곤궁했던 사람이었으리라. 그 생각에 미치면 가슴이 아려온다.


keyword
이전 09화봄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