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 광복절 나들이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와 김수근의 건축, '공간 사랑'을 지나 창덕궁 정문 돈화문 쪽 코스를 잡았을 때는 돈화문에 담긴 북한산 보현봉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웬걸, 보현봉은 뿌연 비안개에 깜쪽같이 지워져 있었고 돈화문도 사진 촬영 자체가 어려울 만큼 물보라에 휩싸였다.
돈화문은 인정전을 지나야 나온다. 이것은 경복궁이나 창경궁의 정문이 정전과 일직선상의 위치에 있는 것과 대조된다. 이미 자리 잡은 종묘의 위치를 피해 서남쪽 모퉁이로 잡았다고 한다. 나는 혹, 저 문 기둥 사이로 보이는 보현봉을 오롯이 담기 위한 조영 의지가 반영된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돈화문(한겨레 신문 사진)
인정전에서 한글 반포가 이뤄졌다는 걸 나는 판소리 춘향전에 나오는 <농부가>에서 알았다. 왜 그런 경사를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에서 하지 않았을까. 한자에 깊이 침윤된 사대부의 기세를 위대한 세종도 팍 누르지 못했을 당시 상황을 짐작해본다.
인정전 달 밝은 밤
세종대왕의 한글 자랑
- 판소리 춘향전 <농부가> 중에서
기록에 따르면 돈화문은 처음에 규모가 크지 않았다. 1412년(태종 12년)에 창건되었고 1451년(문종 1)에 중창되었다. 그 후 1506년(연산군 12)에 돈화문을 높고 크게 개조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외국의 사절이 창덕궁 정전(正殿)에서 왕을 알현하거나 국상(國喪)이 있을 때 상여가 나가게 되는 일들이 생기자 정문을 보다 위엄 있고 크게 만들 필요가 있어서였다. 이 건축물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 ( 광해군 1)에 복구되며 다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돈화문은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과 함께 조선 중기 건축물로 200년 동안 조선 왕조 중심 궁궐이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 대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이 돈화문을 거쳐야 내가 원하는 창덕궁의 후원, 비원으로 갈 수 있다.
청덕궁 후원( 비원)의 백송
비가 와서 더 그랬을까, 비원의 백송은 기가 센 산신령 같았고, 숲은 음산하여 궁궐 안 사람들은 우울증 류의 병이 많을 것 같았다. 맑은 날에는 다른 소나무들에 묻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주위 시선을 압도하며 대지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베이징대학 박물관 앞 백송
내가 백송을 처음 본 것은 베이징 대학교 캠퍼스에서였다. 2005년 늦가을, 베이징대 박물관 앞에 있던 백송은 비원의 백송보다 훨씬 둥치가 굵었는데 베이징이 백송의 원산지라는 걸 표지판을 보고 알았다.
그때 본 백송은 캠퍼스의 모든 나무가 누렇게 시들어가는 계절이라 온 몸이 하얀 소나무는 잎이 사라지고 나무 전체가 희게 보였다. 밝은 대낮에 봐서였는지 영험이 느껴지진 않았은데, 비원의 이 백송은 주위 숲의 진초록을 다 삼켜 버리고 오직 이 나무 하나로 솟아 나온 듯한 착각을 주었다.
창덕궁 후원 백송
비에 젖은 백송은 초록빛 껍질을 띠기도 했다. 물세례를 흠뻑 받은 나무가 뿜어내는 기운은 내 몸을 무겁게 했고 문득 사도세자 정신병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비원을 처음 간 것은 30년 전이다. 남동생 대학입시로 제주에서 상경해 종로구 한옥집에서 자고 동생은 시험 치러 갔고 난 혼자 비원으로 갔다. 겨울이어서 비원은 적요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 이런 구중심처 첩첩 숲에 싸여 살면 백성의 목소리는 듣지 못하겠구나...
후원을 걸으며 궁궐 안에서 그 세계가 전부인 왕족과 그 수하들의 삶이 부럽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 후 베이징의 이화원이나 소주의 졸정원 또는 일본의 잘 가꾸어진 정원들을 볼 기회가 있었다. 내 조국, 내 어머니가 최고여서 일까, 그런 곳을 다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일지는 않았다.
비원은 집 안에 있는 정원이라는 말보다 집터에 딸린 숲, 원림이 더 어울린다. 내가 생각하는 비원의 가장 큰 매력은 건축물들이 자연 속에 숨듯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원한다면 산책만 해도 좋은 오솔길 위주로 조성돼 있다는 것은 외국의 정원 앞에 뽐내고 싶은 조선 유교의 조영 미학이다.
주합루로 이어지는 청덕궁 후원 길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의 이상이 서린 주합루, 규장각 주변 길을 걸어본다. 군주도 꿈을 온전히 이루려면 신하는 물론 누구 말처럼 온 우주가 도와야 성사될 수 있는 것이다. 영민했던 정조의 좌절된 꿈처럼 반복되는 역사를 떠올리는 것도 걸음을 무겁게 했다.
창경궁의 <대온실>
근대 최초의 온실인 창경궁 <대온실>은 겉모양은 그럴듯했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노천에 두었으면 더 잘 자랄 것 같은 먼나무, 비파나무, 호랑가시나무, 녹나무 등의 식물들을 더운 김으로 가둬놓고 있었다. 하기야 이런 식물들은 난대림 기후 제주에서는 아주 흔하게 자라는 것들이나, 이곳에선 구경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대온실>은 분재 좋아하는 일본 취향을 무력한 왕, 순종에게 주입시킨 듯 맥없이 나른하기만 했다. 왕궁에 동물원, 식물원, 대온실 따위를 만들어 정신을 가둬놓겠다는 일본 제국주의 발상이 남아있는 곳이다. 2020년 광복절, 나는 이 현장을 본다.
입구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는 정물같이 고요해서 박제인가 생각할 때쯤 배에서 숨이 미세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털빛이 몹시 보드랍고 색깔도 아름다운 냥이였다.
대온실에서 그나마 수확은 애기동백나무를 본 것이다. 제주 4.3 항쟁의 노래 중 대표 주자인 <애기동백꽃의 노래>는 작은 꽃송이를 말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대온실 > 안에 들어가 보니 키가 난쟁이처럼 작은 동백나무가 따로 있었다. 송홍선 식물학자의 말을 빌면 동백나무는 토종이지만 애기동백나무는 관상용으로 수입되어 널리 심어진 것이라고 한다. 생육조건이 안 되는 지역에서 화분에서라도 동백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 빚은 탄생이었을까. 한라산 아열대의 수많은 식물을 보고 자란 나로서는 한 여름에도 싱싱한 초록을 발산하지 못하는 대온실의 식물들이 좀 측은하게 보인다.
쪽동백나무의 열매
쪽동백이란 나무도 있었다. 잎도 열매도 다른데 왜 동백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알고 보니 동백나무는 제주에서는 흔하디 흔한 나무인데 중부지방을 넘어서면 양육조건이 안 맞아 동백기름은 세금으로 거둬들였단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은 이 나무를 심어 머릿기름을 구했다는 것이다. 보통 아류에는 '개'자를 붙여 개망초 개민들레 하는데 여인네의 가르마를 연상하는 '쪽'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센스가 듣기에도 참 좋다.
홍화문을 빠져나오면 서울대학병원이 보이는 혜화역이다. 창덕궁 정문으로 들어가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으로 나왔을 때는 잠시 개었던 비님이 시야에 자욱했다. 이 근처 유명한 샐러드 바 < 대학로 신선 식탁>를 찾아가는 길에서 올해 버킷리스트 목록 하나를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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