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 수평면 풍경

by 양경인

강요배 <수직 수평면 풍경> 130*161.7


일상을 살면서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된 인간인가 ‘한탄할 때가 있다. 내 품의 그릇이 크지 않다는 것이야 진즉 알고 있지만 그 작음이 속좁음과 구차함으로 드러날 때 참 슬프다.


이 그림은 학고재 화랑에서 열린 강요배 개인전, "상(象)을 찾아서"( 2018. 5.25~6.17)에 걸렸던 작품이다.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울고 싶었다. 당시 나에게 특별한 슬픔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을 흰색으로 끄집어내는 화가의 통찰력에 그저 속이나 울렁이는 내 처지가 갑자기 불행하였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무난하게 어울리려고 유예시킨 나의 내면을 살짝 엿본 느낌 같기도 했다.

저 흰빛은 어디서 왔을까?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 어디쯤에서 올라온 것만 같다. 이 그림을 들여보노라면 나도 선한 의지가 내부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세 번을 가서 봤는데 매번 새로웠다.

이 작품은 눈이 쏟아져내린 날, 작가 작업실 앞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눈 쌓인 수돗가,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제주에서만 보이는 파릇한 채소, 겨울 수선화 , 마른 나뭇가지, 돌확에 담긴 한 움큼 입에 넣어도 될 것 같은 눈.

화가 강요배는 그림이란 무엇인가의 기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그 답은 '상(象)에서 찾았다. 자연의 원래 모습, 즉 상의 이미지를 끌어낼 수 있어야 제대로운 그림이 된다는 것. 작가는 자연관찰은 항상 하지만 외부 대상에 빠지지 말고 거기서 어떤 중요하고 강한 느낌 기운 같은 것이 있다면 이것을 간직했다가 작업실에 와서 한참 지난 다음에 끄집어내 본다고 했다. 그는 추상의 개념도 새롭게 정립한다.


추상은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거나 애매한 그림이 아니다. 상을 끌어내는 것이 추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그림은 추상화다. 인상(印象)도 코끼리 상을 쓴다. 도장처럼 찍는다는 것인데, 인상적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에 찍혔다는 것이다. 추상(抽象)도 코끼리 상(象) 자를 쓴다. 그 상을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화가의 인터뷰에서 )


뇌 물리학자 정재승은 상상과 몽상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코끼리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뼈를 보며 제각각 코끼리 형상을 그리는데서 상상(想像)의 어원이 생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코끼리 뼈라는 단단한 과학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코끼리 뼈가 없으면 그것은 몽상이 된다. 그러나 과학적 상상만으로는 상상의 완성이 안된다. 여기에 예술적 상상. 문학적 상상이 있어야 완성된다.

<수직 수평면 풍경 > 부분도

겨울에도 붉은 열매를 달아 새들을 유혹하는 저 먼나무는 제주에선 가로수로 심기도 한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멀리서 보면 꽃처럼 보이는 나무다. 겨울 철 하늬바람 속에서 진초록 잎새에 붉은 열매만으로도 황홀한데 하얀 눈까지 얹혀 더할 나위 없는 풍광을 보여준다. 친구의 말을 빌면 '절망적으로 아름답다'.


눈이 이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 떡가루라는 말이 어울리게 사박사박 곱게 내려 쌓였다. 차갑다기보다 맑다는 느낌이 더 강한 풍경이다.

나주에 살 때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일제 강점기 때 밭에서 백자가 출토되었을 때 총독부 일본 관리가 백자 여러 점을 놓고 밭주인 농부에게 정돈을 시켰더니 그 농부는 일본인이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는 백자의 색을 세세히 구별해서 정리했다고 한다. 강요배는 하얀색에도 탁월한 감식력을 가진 사람인가 보다.


제목을 '수직 수평면 풍경'으로 한 이유는 풍경을 단순화시켜 수직은 검게 칠하고 수평면은 하얗게 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채화를 그린 적이 없는 나는 물통의 밝은 고동색이 그림을 확 살리는 이유를 몰랐는데 친구가 알려줬다.

- 전체적으로 채도가 어중간하게 낮기 때문이야, 그리고 물통은 수직이면서 수평을 동시에 안고 있으니까


이 그림을 보면 ‘끝내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을 우리들은 기어이 사랑이라 부른다’고 한 작가 김훈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사재를 털어서 살까 말까 망설인 이 그림을 세 번째 학고재 갤러리 방문에서 물어왔을 때, 이미 첫날 팔렸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미칠 수 없는 가격이라 미련을 떨칠 수 있어 시원했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지금은 내용도 거의 까먹은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 그 6펜스의 현실로 돌아왔다.


.


keyword
이전 06화강요배의 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