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몬드 꽃>, 1890,73*92,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텔담 (위 그림은 소장 화집 커버 사진)
<아몬드 꽃>은 고흐가 셍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조카 탄생을 기뻐하며 그린 그림이다. 소울메이트이던 동생 테오는 아들에게 빈센트라는 이름을 주었다.
- 형처럼 굳센 의지와 용기를 갖고 살기 바라는 뜻으로 형의 이름으로 짓기로 했어.
캘리포니아 아몬드협회 사진
(사진 캘리포니아 아몬드협회)
우리나라 봄의 전령사가 매화라면 남부 프랑스 생레미에는 아몬드 꽃이다. 꽃을 강조하는 과감한 구도, 원근법의 부재 , 말라카이트그린빛 하늘의 밝은 색채에는고흐가 좋아했던 일본목판화의 기법이 스며있다. 하지만 나뭇가지의 굵은 윤곽선이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꽃송이를 피어나게 하는 고흐 만의 그림이다. 이 봄은 고흐 생의 마지막 봄이였다.
고흐에 대한 나의 애착은 스무 살로 거슬러 올라간다. 냉골이 흐르는 내 방에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1887)>을 붙여놓고 살았다. "문학사상" 월간지에서 오린 그림이었다. 그의 외모는 요즘 말로 ‘비호감'이다. 지금도 고흐의 자화상들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곤혹스럽고 불편하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책상 한 켠에 그 액자를 두고 근무했던 내 마음의 정황은 나도 잘 모른다. 나는 고호를 닮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에게서 위안 받고 싶었나? 막연히 나는 내 삶에서 그 얼굴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강박의식이 있었던 듯하다. 세상은 부조리가 가득한 1980년대, 세상에 대한 적의와 내 자신에 대한 온갖 콤플렉스가 겹쳐 우울한 청춘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이 자화상이 어느 날 가뭇없이 사라지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밀짚모자 자화상>, 1887, 19*14, 디트로이트 미술관, 미국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의 고흐는 오른쪽 얼굴이 그늘져 있다. 볕에 그을린 얼굴은 붉은 수염과 함께 몹시 지쳐 보인다. 붉은 귀와 붉은 입술이 불안을 가중시킨다. 내가 마주한 것은 무엇보다 눈빛이었다. 자신의 내부를 응시하는 듯 고통스런 눈빛, 그림 속의 고흐가 닿고자 했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고흐 작품 2000여 점 중에 생전에 단 한 점 팔렸다는 말은 그 시대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는 반증이 된다. 보험이 가장 먼저 발달했던 유럽 근대자본주의 선두주자 네덜란드는 화랑 업종이 성황이었다. 고흐는 17세부터 7년동안 사원으로 일했고 동생 테오도 화랑을 운영하였다. 화랑을 나온 고흐는 보조교사, 서점점원을 거쳐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으나 좌절되었고 벨기에 탄광촌에서 전도사를 했지만 1년 후 재계약이 되지 않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테오의 긴 뒷바라지가 시작된 것이다. 화상으로 사업수완도 좋았던 테오라는 동생을 두고도 고흐는 팔리는 작품을 못 그렸다. 자본주의가 무르익던 그 시기 그림의 수요자인 브르주아지 취향과는 동 떨어진 그림들. <감자 먹는 사람들>이나 <밀짚더미>의 그림을 보고 네덜란드풍이라는 화랑주인의 말은 촌스럽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자화상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가 지향하는 가치들을 거부 또는 외면했던 예술가의 고집(?)을 본다. 그 고집은 예술가의 자존감, 소명의식 같은 것이리라.
<고흐의 사진>
고흐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테오에게 보낸 편지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원만하게 사랑을 주고받지 못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과도한 집착을 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고흐의 <해바라기(1888)>를 보면 만개하거나 씨앗을 드러낸 해바라기가 제 각각 춤을 추고 있다. 노란 벽, 노란 책상, 노란 화병으로 혼미할 지경인데 꽃이라 말하기 부담스러운 황갈색으로 여문 해바라기들이 화병의 세 배는 족히 되게 가로 세로 뭉클거리는 그림, 젊어서는 이 그림의 현란한 기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열두 송이 해바라기> , 1888-9, 91*71, 바이에른 주립회화관, 뮌헨
꽃병에서 춤추는 해바라기는 고갱을 향한 고흐의 순정한 그리움과 벅찬 환희일 것이다. 고흐는 사람에, 무엇보다 친구에 목말라 있었고 이를 감지한 동생 테오는 고갱을 형 옆으로 가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고갱을 기다리며 그린 이 그림은 이미 불화를 예감하게 한다. 지나친 기대가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 적이 있었던가. 더구나 불같고 즉흥적이고 일상의 현실감각이 약한 고흐가 잰틀한 생활방식을 준수하는 고갱과 같은 집에서 생활한다는 것, 사태는 이미 예견되어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의학계의 분석에 따르면 고흐가 갖고 있는 정신병은 뇌측엽 기능장애와 우울증, 간질 등이다. 고흐의 귀를 자른 사람은 고흐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 . 고갱의 증언 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흐의 자해행위로 알려져 있지만 진실은 모른다. 고흐의 편지에는 어디에도 자신이 귀를 잘랐다는 말이 없다. 고흐의 권총자살도 마찬가지다. 고흐에게서도 현장에서도 권총이 발견되지 않았다. 현장 취재를 다녀온 분의 말은 '의사 가셰'일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다.
<비애>, 1882, 38.5*29, 반고흐 미술관, 암스텔담
고흐의 석판화 <비애)>를 보면 여성의 알몸이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머리께에 아몬드인 듯한 꽃가지가 있고 땅에서는 겨울을 견딘 꽃들이 피어나지만 마음이 지옥인 사람에게 그 모든 풍경은 언제나 겨울 황무지일 것이다. 그 속에 한 때의 내 모습도 있다. 자신의 귀함을 모르던 젊음의 가엾음이여. 존재의 무게가 겨워 내 몸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젊음의 몸을 모른 채 나는 이십 대를 흘려보냈다. 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고 사계절 회색빛의 옷만 입으며.
이제 나는 한 어미의 심정으로 고흐를 보게 된다. 창녀 시엔에게서 그나마 위안을 얻었을 고흐, <비애>의 알몸 여성은 한 때 나의 내면이기도 하지만 고흐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의 자식들은 자기의 생을 저항하며, 도전하며, 때론 포기하며 살아간다. 고흐에게서 동생 테오는 모든 걸 수용하는 어머니 역할이 아니었을까.
<밀짚더미>, 1884-5, 40.2*30, 크릴러 뮐러 미술관
고흐의 <밀짚더미>는 오십 중반에 발견한 그림이다. 무언가를 해보려는 시도 속에서 손에 잡히는 것 없이 초조한 날들을 보내다가 이 그림을 보게 되었다. <밀짚더미>에 표현된 노랑색의 변주는 벼가 시차로 익어가는 그 빛깔이다. 그림 속에는 묵직한 지평선이 보이고 아직 밀을 거두지 않는 밭과 수확한 밭이 조화롭게 섞여있다. 곡식을 거둔 빈 들이 비어 보이지 않는 것은 고흐의 의도일 것이다. 이런 배경을 밀어내고 밀짚더미 한 단이 화면 전체을 압도한다.
<밀짚더미>에는 밀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투명하고 거친 노란빛이 밀짚단을 춤추게 하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생을 걸어 수확하고 싶은 그 무엇에 대한 갈증으로 몸이 떨려온다. 이삭이 무르익어 툭툭 떨어지듯 그런 수확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 풍경은 단순히 풍요로만 설명하기엔 아쉽다.
이 그림에서 나는 영성의 기운을 느낀다. 그림의 아우라를 관통하는 것은 힘찬 노동의 경건함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하는 성경 구절, 그 해 가을 나는 그림으로 성경을 읽고 있었다. 이 그림은 노동의 결실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어렵고 자연의 보살핌 또는 신의 섭리가 함께 해야 비로소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 같다. 고흐의 삶, 그의 그림은 밀알이 썩는 과정이었다.
오십을 넘어가면서 젊어서부터 내게 영향을 끼치던 멘토들이 사라져 갔다. 나의 과거가 멘토가 되어 미래를 끌어가는 지금, 빈센트 반 고흐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있다. 시시때때로 내 삶을 파고 드는 고흐의 그림들, 이것은 기쁨일까 슬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