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대의 추억

- 강요배의 달

by 양경인

무덤덤하게 바라보던 달을 내 안으로 바짝 당겨 바라보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은 '월대(月臺)'에서 달을 보고 나서부터이다. 월대에서 보낸 몇 시간은 제주를 떠난 지금 각별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날은 내가 적을 두고 있는 연구소의 운영회의가 있었고 동시에 연구소에서 일하던 후배의 송별식을 겸하는 날이었다. 남편은 장기출장 중이라, 여느 때처럼 아이들을 동생 집에 맡기고 회의에 참석하였다. 긴 회의의 긴장을 푸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뒤풀이로 이어지는 술자리에서는 늘 그렇듯 빠져나와야 하는데, 그날은 민적 거리며 좀체 자리를 떠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걱정되어 여동생에게 전화를 넣어보니 " 이미 잠들었으니 걱정 말고 있다가 오라"는 것이 아닌가.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자제했던 6년 만의 술자리였다. 호프집에서 ' 천지연 폭포수처럼' 콸콸 따라서 마셔대던 생맥주가 동이 나자 일행은 막걸리 등속을 사서 택시를 잡아타 용두암 바닷가로 터를 잡았다. 시원한 바닷바람 덕분인지 좀체 취하지 않는 우리들은 사 온 술이 바닥을 드러내자 다음 코스를 궁리하기에 이르렀다. 선배 한분이 "월대로 가자"며 택시를 잡았다.

강요배 <월대> , 캔버스에 유채, 53*72.7 ,1994


5백 년 된 팽나무와 3백 년이 족히 넘는 소나무 세 그루가 '도근천'이라는 내 위로 휘늘어져 있는 곳. 예부터 시인 묵객들이 이 곳에서 달뜨기를 기다렸다가 시흥을 돋우던 월대는 여전히 예술가의 사랑방으로 아낌을 받고 있었다. 이 장소로 우리를 이끈 선배의 말씀이 도근천 지형이 반달과 같아 밝은 달이 뜰 때면 주위와 어우러져 물 위에 비치는 달빛이 장관이라고 했다. 아쉽게도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 경이어서 달은 이미 월대의 시냇물을 성큼성큼 건너 바다로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월인천강지곡의 악보가 전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하룻밤 사이에 달이 강물에 천 개의 도장을 찍으며 지나간다는 것을 맨 처음 간파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속 뜻은 부처님의 은덕이 온누리에 골고루 미친다는 내용이겠지만 그 시정이 절절하다.

(사진 안민희)


어둠이 서서히 벗겨지면서 달은 가뭇없어지고 선배들의 고별 주 공세에 기진한 후배는 마을 사람들이 소나무를 그늘 삼아 쉼터로 만든 시멘트 바닥에 모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제주 돌담의 미학을 들려주던 선배도 술꾼답게 코를 골았다.

( 사진 안민희)


저녁 한 때 달을 품었던 월대의 맑은 물은 다시 근처 팽나무며 노송의 기운을 받아 새벽의 푸른빛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비췻빛이 어룽지는 물무늬를 옛 어른 들은 '용의 비늘'이라고 했다던가.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달 속의 항아를 만나기 위해 여기로 나온다는 화가의 마음을 짚어보며 나는 그의 달 그림을 떠올렸다.


강요배의 <달>, 캔버스에 아크릴, 145.5* 112.1, 2003


그림 제목이 그냥 '달'이다. 산천은 어둠에 잠겨 가라앉아 있는데 휘영청 솟아 마을의 이정표가 되어주던 달. 밝고 서늘한 달빛의 기운은 내 존재의 심연까지 뚫고 들어와 신(자연) 앞에 홀로 서 보길 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야를 무한대로 넓혀 이 달빛을 기다려 어디선가 다투며 피고 있을 박꽃이며 달맞이 꽃들 그리고 물매화의 마음까지 헤아려보게 했다.

그날 밤 선배가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 것이 단지 월대의 풍광이 아니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문득 그 선배가 자연, 곧 제주의 자연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영매(靈媒)처럼 느껴졌다. 아마 전생의 그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바람 까마귀쯤 되었으리라.


주위가 점점 밝아오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소나무가 드리운 평평한 자리터에 눕거나 앉아있었는데, 나는 술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은 월대에서 비로소 취하는 기분이었다. 아이도, 가정도, 생활도 순간 깜박 잊고 있었고 그 몇 시간이 전생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월대와 하직하고 마을을 빠져나오는 데 들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님 그리워서 운다"는 제주민요를 떠올리는 중이었는데 선배들은 "저 소리는 님 그리워 우는 소리"라고 우겼다. 하늘 위로는 붉고 푸른 구름이 현란하게 만다라를 그리고 있었다. 신비하고도 복잡한 색채와 형상으로... 모두들 해장술이 간절한 표정이 되어 인근에 있는 선배의 화실로 가서 해장술을 하자고 했을 때, 나의 일탈은 거기서 끝나고 혼자 빠져나와 부리나케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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