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의 노란색
제주서 서울 오는 비행기에서 한 시간의 무료함을 해결해 줄 거리를 찾던 중 신문에서 <노란 스웨터의 쟌느 에뷔테른, 1918-19, 캔버스에 유채>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모딜리아니가 만삭의 아내를 냉골이 흐르는 집에 둘 수 없어 친정으로 보내기 전에 그렸다는 그림, 처음에는 제목처럼 터틀 목 노란 스웨터에 군청색 치마를 입은 것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니트 원피스 임부복에 푸른색 보료를 무릎에 덮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의 모델이 점점 나의 모습으로 보여서 착륙 안내방송이 나올 때까지 포근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두 아이를 낳던 때도 겨울이었다. 제주의 겨울은 바람이 무섭다. 첫애를 낳고 외출할 때는 따습게, 더 따습게 아기를 껴입히느라 눈사람처럼 되었다. 주택에서는 맘껏 난방을 땔 수가 없었다. 멀리서 보이는 아파트의 불빛이 무척 부러웠던 그 시기가 노란 옷의 잔느 모습 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조각과 원시미술의 세계로 갔다가 다시 회화로 돌아와 그렸다는 이 그림은 고대 불상조각에서 보았음직한 구도적 표정이 아내 쟌느의 얼굴로 재구성되어 당시 처한 상황의 심리 등을 표현하고 있다. 밋밋한 얼굴이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서늘한 표정이 여운을 준다.
20 대에 긴 목과 긴 코, 약간 기운 어깨, 동자가 없는 눈이 특징인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끌렸었다. 인간의 무궁무진한 심층을 상식으로 가두어버리는 사회의 고정관념과 편견에 대한 거부감, 지금 생각하면 기우뚱한 인물 포즈도 똑바른 자세로만 세상을 볼 수 없던, 나의 삐딱한 세상 읽기와 닮았다.
누군가 ‘아몬드 눈’이라고 말했던 쟌느의 푸른빛 눈에는 동자가 없다. 인간 내면을 표현하고 싶었을 모딜리아니의 의욕은 눈동자까지 닿기가 힘에 부쳤는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긴 목도 강조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박연폭포>를 그린 겸재 정선이 푹포 줄기를 길게 길게 과장하여 폭포 소리를 담으려 했던 것처럼.
쟌느의 20대 모습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딸) 잔 모딜리아니 40대 모습
술과 마약과 여색에 취했다는 모딜리아니는 쟌느를 만나고부터 마음이 정착되었다고 한다. 생전의 쟌느 사진을 봤을 때, 그림과는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노란 스웨터’ 속에 있던 딸의 성장한 모습이 그림 속의 여성을 빼닮아 좀 놀랬다. 한 사람에게서 이상의 구현은 당대를 넘어서 나오기도 하나보다.
최근에 나는 모딜리아니의 <누워있는 나부(1917)>에 꽂혔다. 이 그림에는 내가 생각하는 모든 미의식이 녹아 있다. 편안함, 당당함, 화려함, 섹시함, 섬세함, 그리고 경건미까지. 붉은 소파에 누워있는 나부의 나른한 관능, 고혹적인 입술, 화장이 스민 붉은 볼, 나부의 입술은 짙붉은 장미 빛깔이고 비췻빛 눈동자는 꿈꾸듯 오만하다. 나른한 관능과 시원하게 열린 육체, 포즈는 무척 도발적이나 유혹의 몸짓은 아니다. 자세히 보면 긴 허리의 완벽한 몸매는 조각품을 연상시킨다. 팔과 가슴. 복부와 허벅지로 이어지는 다리는 토르소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 살빛을 보라. 보료의 붉은빛과 어깨 위로 받친 푸른 쿠션이 여성의 살빛을 더 풍요롭게 하고 있다. 포즈와 살빛이 어우러져 성의 대상자가 아니라 주체자로, 그 누구에게도 속해있지 않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이 나부는 여성의 몸이 도달하는 모태, 잉태의 몸을 넘어서 인간 그 자체의 몸을 보여준다. 그리고 색과 포즈와 구도와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몸에 대한 위대한 찬가를 부르고 있다.
누워있는 나부(1917-18) 캔버스에 유화
나는 저 여성의 살빛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싶다. 지금 내게 ‘예술이란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나는 이 그림으로 답하고 싶다. 동시에 내 속에 무언가를 쏙 빼내는 예술의 신비에 놀라게 된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많은 부분들, 모딜리아니는 무궁무진한 인간 내면의 심층을 얼굴에 담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람을 안다는 것의 어려움이여. 그러나 그는 깊고 그윽하고 따뜻한 살빛으로 세상을 보는 마음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