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과 편의점 할아버지
프리랜서 기간 동안 3개월 정도 주 3회 서촌에 있는 에디션덴마크 쇼룸으로 출퇴근했다. 쇼룸에서 에디션덴마크의 브랜드 스토리나 제품 상세 설명 등을 작성하기도 하고, 제품을 보러오는 손님을 맞이하기도 했다.
나는 특히 오후 7시의 서촌이 좋다. 아직 밝지만 하늘이 다양한 색으로 물들어가고, 서촌 곳곳의 골목들이 하늘의 빛에 살짝 물든 채 조용하고 수줍게 머물러 있는다. 이전부터 계속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이전에 근무하던, 늘 소란스럽고 자뭇 위풍당당하던 강남 지역과는 천차만별이다.
조용한 골목들도 햇빛이 쨍한 낮에는 발랄하다. 돌담길과 나무 하나하나가 빛나고 생기가 넘친다. 그 여름 주말도 그랬다. 하루는 모처럼 쇼룸을 대중에게 오픈하는 날이라 문을 활짝 열고 오가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시음할 수 있도록 우리가 판매하는 차(tea)를 외부에 전시했다. 더운 여름날 시원하게 마실 수 있도록 우린 차에 얼음을 잔뜩 넣어서 차가운 아이스티처럼 준비했다.
쇼룸의 바로 맞은편에는 편의점이 있다. 편의점 밖 테이블에는, 마치 편의점과 한 세트인 것처럼, 늘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날 오후,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에게 손짓을 하였다. 영문을 모르고 갔더니 자신의 빈 플라스틱 컵을 나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차 좀 갖다줘.
할아버지가 있는 자리에서 쇼룸까지는 고작 걸어서 일이 분 거리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언짢아졌다. 자신이 직접 가서 차를 따를 수도 있는데 굳이 나를 불러서 시키는 이유가 뭘까? 20대 여성이라서 만만하게 보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얼굴을 붉히는 대신 순순히 차를 따라서 다시 갖다드렸다. "이게 뭐야, 너무 적잖아." 화를 꾹 참고 조금 더 따라드렸다.
잠시후 할아버지가 다시 손짓한다. 차를 사고 싶다고 한다. 티백과 잎차,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설명드렸더니 그런 것을 잘 모르겠고 간편한 것을 달라고 한다. 결국 티백을 드렸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현금이 나왔다. "내가 사람들에게 많이 홍보해줄게." 네, 네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할아버지가 다시 나를 부르지 않기를 바랐다.
저녁 7시가 될 무렵, 하늘이 알록달록 물들어갈 때, 갑자기 뭔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가 편의점 옆에 세워두었던 휠체어를 타고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편의점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탄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그는 늘 여기에 앉아 있었는데. 배려가 없었던 것은 그가 아니라 나였다. 관심도 배려의 영역이라면 말이다.
우리는 많은 순간에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역시 그런 오해를 일상 속에서 많이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건이었다. 만약 내가 그 순간 "직접 따라서 드세요"라고 말했다면..생각만해도 아찔했다. 나의 영업용 친절이 도움이 된 것에 안도했다. 하지만 기어코 상대방을 상처입힌 순간도 아마 많을 것이다. 특히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는 서촌의 노을을 배경으로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 떠나는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그 뒤로 종종 만났다.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때도 있었고, 휠체어를 타지 않고 편의점 앞에 앉아있을 때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면 반갑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편의점 할아버지를 좋아하게 되었다.
에디션덴마크에서 일하면서 올해 여름은 차를 유난히 많이 먹었다. 티백을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곧 좋은 향이 풍긴다. 물에서 옅은 색을 띄고 찻물이 우러나는 것이 보인다. 시간을 좀 두었다가 티백을 빼고 차를 마신다.
친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차를 마시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판단하지 않고, 기다리고 지켜보는 것. 타인의 사정이 있음을 아는 것.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음을 아는 것. 그 정도의 여유를 갖고 있다면 편의점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누구에게든 다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