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선생 Aug 07. 2017

무한한 성장에 대한 욕망과 의도하지 않은 베풂

김광석의 노래 <나무>의 노랫말(김윤성의 시 <나무>)

1

바야흐로 관계맺기에 대한 회의가 끊이지 않는 요즘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믿었던 친구와 사랑하는 연인, 갑을과 상하의 결정체인 직장내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스트레스가 심각하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맺기를 기피하고 혼자서 자신만의 삶을 즐기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마치 나 혼자서 살아가는 삶이 대단히 멋지고 좋은 것인양 비춰지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혼자서 즐기는 삶을 옹호하는 입장과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는 입장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삶이 더 좋은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사람은 분명 혼자서만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적절한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다소 억울하고 힘든 부분이 있어도 참고 적응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서 이해와 배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마음의 병만 얻을 뿐이라면 차라리 혼자서 사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 두 입장을 절충해서 인간관계가 지닌 여러 모순과 병패를 해소할 수 있는 조금 더 다양하고 유연한 방식의 모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말이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느슨하게 봐서 90년대까지) 우리는 가족이니 민족이니 하는 거대한 울타리 속에서 '나'의 의미를 찾고는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러한 거대한 울타리가 아닌 순수한 개인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한국문학 속에서도 가족과 민족(통일 따위)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보다 개인의 소소한 일상과 감정을 다루는 작품의 수가 훨씬 많아졌고, 그것이 대중의 인기를 더 많이 차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심지어 청소년 문학에서도 청소년을 단일한 집단으로 바라보던 관점에서 청소년 개개인의 다양한 모습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

김광석의 <나무>라는 노래의 노랫말로 유명한 김윤성의 시 <나무>가 있다. 이 노랫말(혹은 시)은 홀로 살아가는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사실상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먼저 노랫말을 소개한다. 원곡이 궁금한 분들은 번거롭더라도 직접 찾아 들어 보시기를 권한다.


한결 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눈부신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소
누구 하나 나를 찾지도 기다리지도 않소
한결 같은 망각 속을 나는 움직이지 않아도 좋소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소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소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하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 하오

- 김광석 노래 <나무>


김윤성 시인의 시집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 나는 저 시의 원문을 보지 못했다. 다만 포털에서 검색해보면, 일부 표현이 약간 다르고, 시에서는 어미가 '-다'로 되어 있어서 매우 단호하고 건조한 느낌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광석의 노랫말로 윤색되면서 '-하오'체의 부드러운 듯 단단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노랫말이 더 좋다고 생각하여 그 가사를 인용해 보았다. 시는 포털에서 검색하면 블로그 등에서 볼 수 있다. 다만 필자가 시집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자료가 확실한 것인지 의문이 있어 여기에는 인용하지 않는다.


이 노랫말(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황홀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나르시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 화자는 다른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이 없다니, 이는 무슨 의미인가. 아마도 다른 누군가에게 배푸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베풀지 않았으니 감사 인사를 받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행하는 친절과 봉사가 다른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한 행위가 아님을 강조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화자는 결국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나 홀로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다짐을 확고히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일까. 시작도 끝도 없는 침묵 속에서 화자는 조용히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살아가든지, 완전한 단절 속에 혼자 살아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인용한 노랫말(시)에서처럼, 자기 자신에게 황홀을 느끼고 그저 자신이 '자라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표현이 위의 노랫말(시) 속에 있다. 바로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 하오'라는 부분이다. 오직 거대한 자아의 성장,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서 다른 누군가가 비와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다. 물론 화자는 전혀 그런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저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하오'라는 원대한 성장의 꿈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3

주위를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에 빠져 허덕이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다보니 주위를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제법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내 코가 석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피곤하게 생각하거나, 부담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나 역시도 나 자신의 삶에 집중하느라 정작 타인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인간관계는 과감하게 무시해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가 나의 삶에 온전히 집중할 때, 내가 나의 삶을 더욱 멋지게 살아내려고 노력할 때, 나를 마주 대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더 좋은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내가 멋진 선생님이 되고자 노력한다면 나의 강의가 학생들에게 더 의미있게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좋은 가장과 아빠가 되고 싶어서 노력한다면, 나 자신에 대한 그 욕심 때문에 나의 아들과 아내가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내가 아닌 남에게만 집중할 때 더 큰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닐까. 내가 맺는 인간관계가 나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저 아무런 다툼 없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되는 순간, 우리가 더 지치고 상처 받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릴 때는 믿지 않았던 그 말.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라는 그 말이,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면서, 김윤성의 시를 찾아 읽으면서, 어쩐지 진리로 느껴지는 밤이다.  



작가의 이전글 우물 안 우리와 우물 밖 우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