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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Aug 04. 2017

우물 안 우리와 우물 밖 우리

윤동주의 <자화상>으로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

1

  

이번 여름방학 동안 고등학생들에게 자기소개서 작성 강의를 약 10일 정도 진행했다. 자기소개서의 특징과 각 항목별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가 강의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학생들의 자존감을 일깨우는 데에 조금 더 무게를 실었던 것 같다.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하고, 단점이 단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학생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방향에서 자신을 바라봐 주었던 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았다.


  그런데 약 100명 가까운 고등학생들을 만나 보면서 느낀 것은 그들이 자신의 성적 혹은 성과에 얽매어 있다는 점이다. 단지 학교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많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당돌하고 쾌활한 모습을 보이는 학생들조차도 그와 같은 성향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수업 듣고 자율학습까지 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당돌함과 쾌활함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런 건 필요 없다는 말만 들으면서 자랐을 테니, 무리도 아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아주 오래전에 개봉된 바 있지만, 단지 이미연의 연기력만을 남겼을 뿐, 여전히 행복은 성적의 내림차순 정렬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숫자의 좁은 테두리 안에 스스로 갇혀 있는 것이다.


2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은 부정적인 의미이다. 바깥의 넓은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채, 자신이 경험하여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을 가리킨다. 책을 아예 읽지 않은 사람보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에서 사용된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갈릴레이나 콜럼버스가 자신의 가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도 결국은 '우물 안 개구리'들 때문이었다. <데미안>과 같은 작품 속에서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라는 메시지가 나타나는 이유도 결국 세상에 상당한 수의 '우물 안 개구리'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쾌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지금 우리들은 대부분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고 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정해 놓은 행복의 틀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고등학생들처럼 명문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점수에 갇혀 살고, 대기업과 관공서의 좁아터진 출입문 앞에서 먼저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물건은 그 가격에 상관없이 가져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짝퉁이라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이들도 있다. 이는 모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 속에 자신을 두기 때문이고, 이러한 잣대를 가지고 스스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욜로(YOLO)' 같은 말도 남들에게 더 멋있게 보이는 취미를 즐기기 위해 돈을 들이는 행위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사실 '우물 안 개구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고작해야 우물 입구만큼의 하늘만 바라보는 개구리처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거나 원하는 것만 우리도 바라볼 수 있다.


  우리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현재의 장소에 만족하고,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한다고 생각한다. 그 개구리는 도약할 힘을 잃었고, 우물 밖으로 뛰쳐나갈 수 없다고 믿는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을 언제나 관찰자 시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정 '우물 안 개구리'는 우리와 동떨어진 문제인 것일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지금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 개구리' 그러니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불과하다. 우물 안 개구리를 들여다보는 우리의 모습이 우물에 그대로 비친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에 대한 생각을 비틀어 볼 필요가 있다. 윤동주의 <자화상>이라는 시를 통해서 살펴보자.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어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펄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저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저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펄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자화상> 전문(최동호 주해, 『원본 윤동주 시집』, 30-31면)


  윤동주의 시 <자화상>은 산속을 거닐던 사나이가 '우물 속 사나이'와 대면하는 장면을 반복하여 그린다. '우물 속 사나이'가 미워지고 그리워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산모퉁이를 돌아서 걸어오던 사나이에게 '우물 속 세상'은 뜻밖에 '밝은 달', '파란 바람', '흐르는 구름'을 아름답게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사나이는 존재한다. 우물 밖 사나이는 이 우물 안 사나이를 미워하게 된다. 어쩌면 냉혹한 현실과 달리 평화로워 보이는 우물 속 세상을 질투했는지도 모른다. 되돌아 걷던 사나이는 다시 그 우물 속 사나이가 그리워져 되돌아온다. 그렇지만 다시 우물의 아름다운 풍경 속 사나이가 미워진다.


  지금 우리 시대에 이 우물을 가져와 보자. 콘크리트 블록을 걸어가던 사나이가 내려다보는 우물 속에는 높은 빌딩이 솟아 있고, 자동차들이 번쩍거리며 달리고, 지폐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그 속에는 한 사나이가 비친다. 우물 속에 펼쳐진 환상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떨치고 돌아설 것인가. 어쩌면 시기와 질투에 돌아서고 말 것이다. 심각한 경우 우물 속에 뛰어들기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3


  윤동주의 <자화상>에서 '우물 속 사나이'와 바깥의 사나이는 우물이라는 거울을 사이에 두고 분열된 자아이다. 우리 시대에 살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도 사실, '우물 밖 개구리'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하여도, 당연히 나올 수가 없다. 우물 안에 펼쳐진 안락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당신이 돌아서지 않는 이상 말이다.


  어쩌면 '우물 안 개구리'와 '우물 밖 개구리'의 끊임없는 절교와 화해가 반복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우물 속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그 속에 자리잡은 편안한 개구리. 그렇지만 그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우물 밖의 개구리. 이 두 개구리 중 우리가 선택해야 할 개구리는 사실 없다. '우물 안 개구리'를 비난 할 수도 없고, '우물 밖 개구리'를 인정할 수만도 없다. 두 개구리의 절교와 화해를 지긋지긋하게  반복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삶을 삶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우리야말로 진정으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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