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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답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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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Dec 14. 2023

취(趣)*

    여기는 커피가 없나요 아뇨 술은 마시지 않습니다 차 때문은 아닙니다 사람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제 사람처럼 살고 싶어요 잘 모르시죠 아뇨 술을 잘하는 줄 알았지만 자주라는 의미일 뿐입니다 사람 때문에 술을 처음 마셨습니다 아뇨 솔직히 귀술이었어요 어머니가 주셨던 정월대보름의 잔술입니다 귀가 밝아진다는 미신을 믿었고 저도 한잔만 딱 한잔만 받아 마시곤 했어요 미간을 찌푸리면서요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먼저다 무엇보다 사람이다 선배들은 항상 술을 놓고 말씀하셨고 저는 술에 취해 그 말을 듣고 새겼습니다 술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술 때문에 사람을 잃는다는 건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맞아요 귀밝이술처럼 마셨어야 하는 것을 저도 모르는 곳에 웅크렸던 짐승을 놓쳐 으르렁으르렁 거리도록 만든 탓이었습니다


    커피는 아직 없나요 그렇군요 술은 취하게 만들죠 원하지 않는 잠이 오기도 합니다 마는 커피는 그렇지 않더군요 차 때문은 아닙니다 대리 운전이 있잖아요 사람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대리할 수 없는 사람 때문입니다 저 때문입니다 그 짐승이 저 자신을 대리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해하시죠 처음 들으시나요 괜찮습니다 콜라도 취하는 건가요 날이 습한 건가요 비가 온다고 했나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앞에 계신 여러분은 취하셨고 취하지 않으셨대도 저마다 취하시니, 다음에도 제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게 놀라워 여쭈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저는 저대로 취하겠습니다 그래도 콜라 대신,


    커피면 좋겠네요


    *중생이 자신이 지은 업인(業因)으로 인하여 이끌리어 가거나, 스스로 찾아 가는 삶의 상태. 또는 그런 세계. 오취(五趣), 육취(六趣), 선취(善趣), 악취(惡趣) 따위가 있다(『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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