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선생 Mar 05. 2024

한 자리에서 맴도는 이에게

물론, 두 점을 잇는 최단 거리는 직선이다. 따라서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길 대부분은 목적지가 멀면 멀수록 직선이 아니다. 모든 산에 터널을 뚫고, 모든 강에 다리를 놓아 건너면서 직선으로 나아가면 될 것 같지만, 그런 극단적인 직선 경로는 생각처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직선으로 내달리는 듯한 길도, 어느 높은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직선으로 뚫은 듯한 터널도 완만하게 휘어져 있다. 어쩌면 직선으로 어느 지점에 최단 시간에 도달하려는 욕망이 저리를 실수를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욕망에 의지가 가미되면 비로소 욕심이 된다. 욕망은 잠재적이고 무의식에 가깝지만, 욕심은 뚜렷한 지향성을 가지고 실천력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려는 마음’이 ‘욕망’이라면, ‘어느 지점에 직선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욕심’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어느 지점을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려는 욕심은 어느 지점에 다다르려는 욕망에 반한다. 욕망은 하나의 대상만을 향해 곧게 나아가지 않는다. 욕망은 수많은 대상을 향하며 변덕스럽게 이곳저곳에 시선을 둔다.      


‘어느 지점에 나아가려는 욕망’에 ‘어느 지점을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려는 욕심’이 ‘폭력’을 가한다. 마치 벽을 뚫기 위해 거대한 못을 거대한 망치로 내리치는 것처럼. 그러나 못대가리를 내리쳐 벽에 구멍을 내기보다, 나사못을 꾸준히 돌려서 구멍을 내는 일이 더 수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구멍을 내는 모든 물건이 회전운동을 한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앞을 향해 모든 힘을 쓰지 않는다. 방향을 잃지 않은 채 강렬하든 지긋하든 회전을 멈추지 않을 뿐이다.     


벽에 박히는 입장에서도 강압적으로 가하는 폭력보다 지그시 누르면서 돌리는 힘이 조금 더 반가울 수 있겠다. 나무의 저항(마찰력)에 맞서 대가리를 얻어맞으며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못처럼, 우리도 우리를 향해 가해지는 폭력적인 요구를 견디며 앞에 놓인 거친 세상에 맞서 자리를 잡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나사못이 그러한 것처럼, 나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되 사방을 둘러보며 회전운동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방황이 아니다. 방황이라는 말은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꿈꾸는 자리를 포기하지 않은 채 이곳저곳 한눈을 판다면 그것을 방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 왜 조금 더 빨리 네 자리를 욕심내지 않느냐고 물을지는 몰라도 방황한다고 질책할 수는 없을 듯하다.      


여유롭든 매우 급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스스로 뚫고 들어가려는 지점을 향해 전력을 다해서는 안 된다. 지점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절반의 힘과 중심을 유지하며 사방을 돌아보려는 절반의 힘을 지닐 때 오히려 더 멋지게 자리 잡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가리가 꺾인 채 자리 잡은 못이나 대가리가 떨어져 나가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없게 된 처참한 못이 아닌, 돌아볼 힘을 지닌 이상 어디든 자리 잡을 수 있는, 나사못처럼.

작가의 이전글 대상의 속성은 존재하는가 부여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