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하여(가르고)' '셈을 맞추는(치는)' 행위일 수도 있다.
교육할 권리가 곧 권력이 되고
교육받을 의무가 권력에 따르는 일이 되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을 한쪽 편향으로 설정하는(가르는) 과정이 될 수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가리게(여럿 가운데서 하나를 구별하여 고르게) 만드는' 행위는 곧
'가르고 치려는(가르치려는)'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교사(敎師)는 모르겠지만,
선생(先生)은 가르치는 사람이어서만도 안 되겠고,
가리키는 사람이어서만도 안 되겠다.
지시봉을 들고 하나하나 짚어 나가는 교사보다
깊은 지식의 바다에 함께 빠져 헤엄치는 선생이 좋다.
아무렇게나, 아무 데나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교사보다
영법(泳法)을 가르치는 대신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선생이 좋다.
어쩌면 교육은 '가르치면서 기르는' 일이기보다
'함께 어울려 자라는 일(交育)'이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선생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부족한 선생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부족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