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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Nov 06. 2018

과강을 조심하라

過強하다: 지나치게 세다(feat. 표준국어대사전)


과강을 조심하라


30대에 접어든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쪽지에는 '정용호'라는 이름과 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일종의 '계율'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 뜻을 잘 모르셨지만(쪽지에는 한글로만 적혀 있었다), 나를 위해서 그 작은 종이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셨던 것이다.


'과강'은 곧 지나치게 강한 성격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나는 강하고 고집스러우며 다혈질을 타고났지만, 그것은 화가 났을 때에 나타나는 경우이고 평소에는 소심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다.


강하고 고집스럽지만, 소심하고 나약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한다.


내 생각에 진정으로 조심해야 할 '과강'은 치우침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순된 감정과 생각, 기질 같은 것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하고 집중한다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있을까. 소심하고 여린 사람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힘들까. 반대로 그런 단점을 오히려 강화해서 '세심하고 섬세한' 성격으로 변화시킨다고 했을 때, 그것이 무조건 좋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섬세한 감수성이 지닌 위험성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선한 감정이든 악한 감정이든 모두 나를 위해 필요한 감정들이 아닐까.


우울함과 상실감은 하나의 길만을 꾸준히 걸어갈 때 찾아온다. 자신이 믿고 있던 단 하나의 길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거나, 끝도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의 길만을 가지 않는다면 어떨까. 늘 어느 정도 갔다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절망과 우울, 상실감 같은 것은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과강을 조심하라"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하고 싶다. 저 말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고집'과 '줏대'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옹졸함으로 보이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고집과 줏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어김없이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난다면 다양한 성격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나' 자신에게도 돌아올 것이다. 물론 또 다른 상황에 처한다면, 그에 맞는 성격을 끄집어내어 사용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과강'을 조심하는 지혜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시소는 언제나 두 사람이 필요해.
내 마음에도 시소가 있고, 그것이 재미있는 놀이가 되려면
부정적인 성격과 긍정적인 성격 모두 양쪽에 앉아 있어야 하겠지.
한쪽이 없어져 버리면, 내 마음의 시소는
더 이상 놀이기구가 아닌 거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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