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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남아 도는 사람들’, ‘남아 도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의 가치의 경중을 감히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 '중심'과 '주변', '갑'과 '을', '20:80'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굳이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남아 도는 ‘잉여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과연 그러하다"라며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있겠는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그들이 지녀야할 속성을 철저하게 구분하여 규정하는 것은 삶의 '불완전 연소'를 부추기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언어유희’(aka 말장난)로 보이겠지만, '나'를 지칭하는 한자 '余'(나 여)에는 나머지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대단히 재미있는 사실이다. 한자의 발생 배경과 제자[製字] 원리를 상세하게 모르더라도,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데 하나의 글자가 사용된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나’와 ‘남아 도는 것’의 관련성을 이야기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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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남성 혹은 여성의 형태를 가지고 태어난다. 간혹 분명한 형태를 가지지 못하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이 두 형태를 갖고 태어난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이 형태를 가지고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이루어진다. 물론 형태는 기능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남성의 형태를 지닌 사람과 여성의 형태를 지닌 사람의 신체적 기능도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잘 안다. 태아일 때 모든 사람은 남성과 여성을 함께 지닌다. 태어날 순간이 다가오고 출산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분명한 성별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2차 성징'이라는 대격변을 경험할 때까지, 모든 인간은 '남성+여성'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수만년 혹은 그 이상 동안 쌓아온 문화로써 남성과 여성 각각에게 어울리는(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어울려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역할을 강조하고, 그것에 길들여지게 된다. 우리는 이때 나[余]의 나머지[余]를 잃어버리게 된다.
물론 우리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잘 하는 것,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진정한 욕망과 꿈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잘 못하는 것, 내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내가 해야만 하는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응당 자신의 성별을 떠올리게 된다(물론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떠올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나 자신의 모습은 당연히 지워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무의식에 각인되고, 언젠가 마음의 병으로 나타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삶이 나 자신의 완전체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나머지 부분일 수밖에 없다. 그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달라지는 것이다. 태워버릴 것인가, 재활용할 것이가, 재사용할 것인가. 그렇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나머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왜 성공하고 싶어하는가", "나는 왜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가/하고 싶어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아름다워지고 싶은가"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들이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불확실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거둬내고 확실한 것으로 충만하기를 바란다. 불확실한 미래와 불안한 선택, 불분명한 감정과 행동을 거부한다. 청소년들이 입시 전쟁에 고통받는 것과 청년들이 좁은 취업문을 돌파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 역시 불안정한 삶을 청산하고 안정되고 확실한 미래를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죽음이라는 필연을 맞이해야만 하는 나약한 인간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불확실성에 대한 거부감은 자기자신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과 ‘현실 속에 존재하는 나’가 완벽하게 일치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불확실성에 대한 거부감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실수를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실수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자신이 실수할 리가 없다고 믿으며 실수를 저지른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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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습은 이른바 ‘착한 아이 콤플렉스’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올바른 나의 모습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만약 자신과 타인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되었을 때에 대단히 괴로워한다. 언제나 일관된 모습으로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억압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문제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보편적인 도덕 원칙을 지키기 위한 강박이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강박이든, 결국 나 자신의 일부분을 억누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이렇게 짓눌린 욕망, 은폐되어 보이지 않는 나만의 욕망이 바로 ‘의식하는 나’로부터 소외된, ‘남겨진 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余]’는 ‘남겨진 것[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