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에서 모호성으로

내 삶의 완전연소를 위하여

by 정선생

이부영은 아니마(남성이 지닌 여성적 무의식)와 아니무스(여성이 지닌 남성적 무의식)를 설명하는 글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온전히 의식화할 수 있을 때에 진정한 자기실현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한다(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한길사, 2001). 이는 결국 어떤 인간도 남성이거나 여성일 수만은 없고, 모두가 '남성과 여성의 혼합체'라는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페미니즘 이론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젠더'는 문화가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앞에서 개략적으로 이야기한 것처럼, 최초의 인간이 여성에게 자연의 신성함을 부여하기는 했지만, 남성과 여성 사이의 엄격하고 본격적인 구분은 인간 공동체의 문명(문화)이 발전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아직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할 때에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자연에 맞서 싸워야 했을 것이고,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과 방식이 우리가 흔히 접하는 야생동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갈등,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각각 경험하는 고통들은 모두 이 자연적인 속성을 억누른 데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자연적인 속성'이라는 것은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는 구분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심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일 수 없고, 오직 '남성+여성'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직장 내 성희롱을 금지하자는 캠페인의 골자[骨字]는 '남자가 말이야~, 여자가 말이야~'라는 당위적인 표현을 삼가는 것에 있다. 남자라면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는 것, 여자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거둬내는 것이야말로 성희롱을 없애는 첫걸음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신체적으로 동등하며, 따라서 남성과 여성이 모두 똑같은 일을 해야 하고, 똑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남성이 자신의 신체적 능력(힘) 때문에 더 많은 일을 한다면, 여성보다 많은 보상을 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동일한 사무실에서 동일한 서류 작업을 하는 경우라면, 혹은 동일한 육체노동을 하는 경우라면 그들 사이에 차별은 없어야 할 것이다. 또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그 사람의 실제 능력과는 무관한 일을 시키거나, 그 사람의 정서적 특징을 헤아리지 않고 언행을 일삼는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살면서 많은 것들을 놓치고는 한다. 바쁜 일상을 보낸 후에 찾아오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은 우리가 무엇인가 놓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내 생각에 우리의 인생은 이른바 "불완전연소"와 같다. 자기 자신이라는 연료를 온전히 태우지 못한 채 소모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불만이 일상생활에서 끊이지 않고(흔히 남편이나 시댁 흉을 보는 것처럼), 정치적 사회적으로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이유는 바로 이 "불완전연소"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성[母性]'이라는 여성의 반쪽(혹은 1/4쪽 인지도 모를)으로만 자신을 표현하라는 강요 속에서, 여성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인생을 소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하면, 앞서 말한 성희롱적인 시선들("여자가 무슨~, 여자가 말이야~")로 고통받아야 하는 일들이 빈번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여자가 대단하네요"라는 칭찬마저도 성희롱이 될 수밖에 없고 말이다("저는 그냥 대단한 거예요. '여자라서' 대단한 게 아니에요").


이는 비단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성'에 대한 강요, 여성이 자신의 삶을 "완전연소"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성'이라는 허상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는 것은, 남성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할 것이다. 나는 '모성[母性]'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모호성[模糊性]'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모성에서 모호성으로', 그것은 '또 다른 여성'을 상상하는 첫걸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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