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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Feb 22. 2019

我喜樂-즘[아나키-즘]

나의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기

흔히 무정부주의라고 해석되는 아나키즘은 '체제'에 대한 거부로 이해할 수 있다. 체제라는 것은 시스템이고 그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형식을 강요하게 마련이다. 정부에 대한 거부는 결국 국가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구성하고,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각종 병폐들을 부정하는 운동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아카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끊임없는 체제의 전복, 다시 말해서 어떠한 안정된 상태도 거부하는 전복의 무한반복만 남게 된다.


그러나 체제의 전복을 무한히 지향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한나 아렌트가 프랑스혁명과 미국 혁명을 대비하면서, 미국 혁명을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과정에서도 결국 혁명은 어떤 확고한 질서의 확립을 마련함과 동시에 혁명의 주인공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프랑스의 혁명주체들은 혁명 이후에도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결국 그들이 부정하고자 했던 전제군주의 그것을 닮아버렸다. 그에 반해 미국의 혁명주체들은 합중국을 위한 헌법을 만들고 국가의 권력을 그 문서 자체에 위임함으로써 혁명의 완성을 이룰 수 있었다고 읽을 수 있다(한나 아렌트, 『혁명론』).


물론 혁명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시선은 김수영이 시에서도 나타난다. 김수영은 이승만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데에 성공한 4.19 혁명이 결국 5.16이라는 새로운 왕좌를 마련하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누구보다 절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다 / 혁명이란 /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라고 말한다(<육법전서와 혁명>). 이와 같은 구절은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프랑스혁명의 마무리 단계에서의 문제점과 4.19의 마무리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관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혁명은 모든 것을 혁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이 체제에서 우두머리만 바꾼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혁명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날마다 안정을 꿈꾼다. 안정적인 수입과 일과 휴식의 정교한 분배, 그리고 가정에서조차 이루어지는 완벽한 분업을 통한 신체적 정신적 안정을 꿈꾼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는 없는지도 모른다. 안정적인 것과 행복한 것은 전혀 별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껏 누리고 있는 안정적인 삶이란 결국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틀 속에서 나의 위치를 잡고 살아가는 삶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정한 나의 삶도 아니고, 이미 누군가 지나간 흔적을 좇아 나아가는 형국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기보를 보고 바둑을 익히는 이유는 그것을 바탕으로 나만의 창조적인 기보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 알파고가 창조적인 이유는 그것이 진정으로 창조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간이 기억하지 못하는 기보까지 기억하기 때문에 창조적으로 보일 뿐이라고 믿는다. 매 경기를 치를 때마다 새로운 기보를 입력하고, 그 기보를 활용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 말이다. 알파고는 바둑을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두지만, 결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나중에 그것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아마 인간이 프로그래밍해준 행복의 공식을 모두 학습한 후 그것을 조합하여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세돌의 값진 1승을 기억하고 있다. 그 순간 우리는 기계에게 한 번이라도 이겼다는 안도감 너머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꼈을 바둑기사를 보았다. 행복은 그렇게 질서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 찾아오는 우연한 승리에서 느끼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생활, 너무도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우리는 불행을 느낀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나만의 행복을 느끼기 위한 방법론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아나키즘을 '아낙희즘(我喜樂-즘)'이라는 새로운 단어로 바꾸어 부르고 싶다. 나의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상, 그것은 결국 관계 속에서의 일탈을 승인하는 사상이다. 그러나 일탈은 일상이 존재해야만 가치를 지닌다. 혁명이 가치를 지니는 것은 혁명해야 할 상태나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는 혁명은 새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뀌어야 할 것을 찾기 위해 일상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기존 질서나 관계 속에서 벗어나 나만의 즐거움을 찾으려는 '아낙희즘'은 달콤한 일탈을 위해서 일상적 관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삶의 부정과 긍정이 뒤섞인 모순적인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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