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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Jul 31. 2019

서방님과 바깥양반

현실 앞에 무능한 남성의 기표

요즘 젊은 부부들은 아닌 경우가 많지만, 어르신들은 '서방'이나 '바깥양반'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남편을 가리키거나, 다른 사람의 남편•사위 등을 가리킬 때 쓴다.


서방은 말 그대로 책이 있는 방을 가리키고, 방 안에 앉아 책을 읽던 옛 선비의 모습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렇게 책을 읽던 선비가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집을 떠나 관가에서 일하게 됐을 텐데, 그럼 바깥양반이 된다.


이 두 표현은 과거 남자들의 생활이 집안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방은 방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고(혹은 졸았거나) 집안 살림과 그를 먹여 살리는 일은 철저히 아내('안'과 관련되어 있을 게다) 책임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무능한 남성의 표상이다. 차라리 함께 논밭으로 나가 일을 하던 농부야말로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남성인지 모른다. 배움이 없는 남자가 권위적이라는 상상은 어쩌면 귀족주의적 발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바깥양반은 심지어 집안을 떠난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구체적인 물질세계에서 찾지 않고, 이상적인 허언으로 정쟁을 펼치는, 혹은 이상적인 국가 건설에 이바지한다는 허상에 빠진 채 바깥을 돌아다닌다.


지젝에 따르면, 남성이 성장하면서 바깥세상으로 이주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애초에는 여성의 세계에서 나고 자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반페미니즘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 세계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삶(토대를 잃고 부유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국 근대 이성의 초월적 힘이 남성의 것임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완전한 자유를 바탕으로 물질세계를 자신에게 귀속한다.


그래서일까, 사실 서방과 바깥양반은 물질세계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이상에 젖어 사는 무능한 남성들을 비꼬는 말처럼 들린다. 시인 김수영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찾아 헤매던 이상과 현실의 접점은, 사실 남성들의 배부른 고민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성은 물질세계에 천착하고,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정신세계에도 상당한 진출을 이뤄냈다. 그러나 남성은? 앞에서 말했듯 지젝은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남성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의문 자체가 여성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차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그저 허상이라고 말할 수도, 그것이 이미 확고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현실. 그래서 성차를 다각도로 바라봐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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