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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Mar 17. 2020

내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한다. 일자리가 넉넉할 때는 몰라도 일하고 싶어도 일할 만한 곳이 없는 요즘에는 이 말처럼 서러운 게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을 앞세워 제4차 산업혁명을 선언할 때에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노동은 인공지능과 로봇에게 맡기고 여유롭게 노닐고 창조적인 지적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인간은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듯이 말했다.


주 52시간 근무로 인해 여유로운 저녁 생활(애프터 식스 라이프)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52시간 동안만 일하고도 여유 있는 삶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여유로운 삶’이 ‘평균적인, 보통의 삶’을 가리킨다고 해도, 이미 우리 삶의 ‘평균’과 ‘보통’은 쉽게 오를 수 없는 높이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면 ‘보통’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고문’과 보통의 삶을 누리지 못한 이유는 그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자기 비난’ 사이에서 많은 사람이 방황하고 있다. 방황하지 않고 줏대를 세우려고 해도 타인의 시선 앞에 흔들림 없이 당당하기란 만만치 않다. 타인의 시선을 견디며 살아가는 데 쓰는 에너지나, 아등바등 ‘보통’을 향해 달려가는 데 쓰는 에너지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대체로 끊임없이 나를 소모하는 삶으로 되돌아간다.


현재를 즐긴다는 말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굴복하지 말라는 말이다. 니체가 크리스트교를 비판했을 때에도 구원의 약속을 빌미로 현재의 삶을 등한시하도록 만든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저 신을 믿으면 현재의 삶에 상관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니체의 비판이 무조건 옳지는 않지만, 그 논리적 맥락은 새길만하다. 우리가 미래만을 바라볼 때, 현재의 삶은 조금 비참하고, 힘들고, 불행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래를 위한 준비보다는 현재를 즐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목격하는 즐기는 삶은 지금 당장 가지지 못할 것을 억지로 쟁취하고, 그 빚을 갚아나가느라 미래를 발목 잡히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재 이루어지는 무한한 소비, 그것은 현재의 풍요(쾌락)를 위해 미래를 저당 잡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주장했다. 그것은 똑같은 삶이 반복된다고 해도 “그래, 다시 한번!”을 외칠 수 있는 긍정의 태도다. 그렇게 보면, 니체가 부르짖은 ‘힘에의 의지’는 현재의 삶을 부정하며 더 나아지려는 발버둥이기보다, 현재의 삶이 무엇이든 긍정하며 살아낼 수 있는 힘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사람은 설령 시궁창 같은 삶이 되돌아온다 해도 결코 도망치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힘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가진 한도 내에서 만족을 찾아야 한다. 만족이 어렵다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도 공고히 함으로써 줏대 있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현재의 삶을, 온전히 내 삶을 즐기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반드시 다다라야 할 목적지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을 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추상적인 ‘숫자’에 목메지 않을 수 있을 때, 세상은 고요하고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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