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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Jan 14. 2018

지고 또 져도 즐기는 게임

시지푸스와 정지용의 <장수산 1>

    시지푸스(Sisyph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입니다. 그는 굉장히 교활한 인물이었는데, 신들을 기만한 죄로 벌을 받게 됩니다. 신들은 시지푸스에게 산꼭대기에 커다란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내렸습니다. 물론, 겨우 그것뿐이었다면 시시포스는 그 벌을 간단히 해치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벌이 무시무시했던 이유는 시지푸스가 산꼭대기에 바위를 올려놓아도, 바위는 계속해서 굴러 떨어진다는 데 있었습니다. 시지푸스의 벌은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들이 시지푸스에게 벌을 내린 까닭은 아무런 성취도 없이 반복되는 행위로 인한 ‘무기력한 삶’, ‘권태로운 삶’에 그를 빠뜨리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시지푸스에게 내려진 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아주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직장에서 일정한 수입을 얻고, 그것으로 나를 위해 투자하거나, 저축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대단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나의 삶이 그로 인해 크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내 삶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뒤떨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 앞으로도 이런 삶이 이어지는 어떡하나 싶어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뚜렷하고 특별한 성과가 보이지 않는 생활은 이내 권태를 가져옵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게 됩니다. 나아가 그런 일을 하는 내 삶마저 가치가 없어 보여 무기력해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권태로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일탈을 시도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불금’이라는 말이 그러한 일탈을 대변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잘 알다시피 ‘불금’은 ‘불타는 금요일’을 줄인 말인데, 금요일 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쌓아둔 스트레스를 당장 해소할 수 있는 상징적인 시간이 되었습니다. 엄청난 위력을 가진 ‘폭탄주’를 마시거나, 친구들과 한바탕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고 나면 뭔가 개운한 기분마저 듭니다. 그 개운함이란 자신을 짓누르던 지루한 삶을 저 멀리 떨쳐버렸다는 데서 오는 쾌감일 것입니다. 일탈을 통해 권태로운 일상을 잠시나마 잊을 수는 있지만, 권태를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어찌됐든 일탈이란 현재의 삶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탈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면 다시 권태와 마주해야 합니다. 권태를 이기기 위해서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자신의 하루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 속에 뭔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찬찬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것만 같은 일상도 사실은 저마다 새로운 요소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지푸스는 너무나 교활했기 때문에, 신들로부터 미움을 샀고, 따라서 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지푸스는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들이 준 벌을 회피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마저 속이고 기만할 수 있었던 인물이라면 분명 그 벌로부터도 도망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니 적어도 저항할 수는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지푸스는 굴러 떨어지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에 계속해서 묵묵히 밀어 올렸습니다. 혹시 그는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리는 벌을 수행함으로써 삶의 어떤 의미를 깨달은 것은 아닐까요.


    오늘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내일이 오늘과 크게 다를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루하게 이어져나가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비슷한 일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어떻게든 주어진 일상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삶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는 이미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벌목정정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좃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번 지고 웃고 올라 간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랸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없이    장수산속 겨울 한밤내― 정지용, <장수산 1>


정지용의 <장수산 1>은 그의 후기 시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요한 겨울산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시입니다. 이 시에서 순전히 이미지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겨울 산의 고요를 담아내는 조용히 읊조리는 시구를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늙은 사나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늙은이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여섯판의 내기에서 여섯번을 지고 웃으면서 산속의 절로 올라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웃절 중”과 “늙은 사나히”가 연이어 그를 지칭하고 있어서 그는 세상에 속하기도 세상에서 벗어나기도 한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인물은 승패의 집착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는 다만 규칙을 지키면서 얻게 되는 우연의 결과를 즐기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져도 웃을 수 있습니다. 시인 역시 깊은 고요 속에서, 승패의 집착에서 벗어난 늙은 사나이와 같이,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겨울 깊은 밤을 견디려는 의지를 다집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겨울 산의 깊은 고요를 닮았는지 모릅니다. 특별한 일도 없이 그저 하루 하루가 반복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할 것도 없는 하루하루에 나름대로 차이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몫이라는 걸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오늘도 나에게 소중한 하루가 주어진다는 그 지루하고 변함없는 사실. 그렇게 반복해서 주어지는 하루를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결코 권태로울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사소한 우연 때문에 조금씩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문득 굴러 떨어진 바위를 산꼭대기로 다시 밀어 올리던 시지푸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다시금 궁금합니다. 어쩌면 그의 입가에는 ‘다시 한 번’ 잠깐의 성취를 맛보리라는 즐거움의 미소가 가득했을지도 모릅니다. 시지푸스에게는 신들의 벌이 어차피 굴러 떨어질 바위를 지겹도록 밀어 올리는 권태롭고 무기력한 삶이 아닌, 짧은 순간의 성취감으로 가득한 충만한 삶이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신이 나에게 준 규칙! 굉장히 어려운 인생의 게임! 결과를 떠나 그 어려운 난이도를 반복해서 즐기는 것,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혹한 운명에 ‘빅엿(?)’을 먹이는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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