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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삶과 사적 삶

데모스와 오클로스

by 정선생

영화 <목격자>는 정의의 실현과 개인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시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교통사고 목격자조차도 쉽게 나타나지 않는 각박한 현실은 살인사건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의 비겁함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자신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그 비겁함이 자신의 생활을 얼마나 위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고민이 남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벌어지며, 심지어 그의 아내가 보여주는 '정의로움'은 그가 남성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품성'을 갖추지 못했음을 부각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주인공에게 남성다움으로써 정의를 요구하는 국가권력(경찰)도 사실상 무능력한 존재일 뿐이다. 개인의 삶이 위태로워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익을 위한 선택을 했지만 정작 그 위험 요소를 제대로 제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것을 위해 현실적인 것을 무조건 포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를 되묻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데모스와 오클로스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오클로스는 생업에 종사하며 삶을 유지하기 바쁜 사람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공공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데모스는 귀족처럼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오클로스처럼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전념할 필요는 없는 중간적 존재로서 공공의 삶에 대한 생각이 있고 또 그 생각을 전달할 의지와 힘을 가지고 있다.


영화 <목격자>에서 주인공이 목격담 진술을 꺼리는 이유는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크게 봐서는 정의를 바로잡고 그 정의가 자신의 삶을 포근히 감싸주도록 만드는 것이 옳다. 그러나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가족들을 보면 그런 도덕교과서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는 피해자, 목격자, 증인에 대한 보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2차 3차 피해를 낳는 사례가 있었다. 그런 사례의 누적은 공공의 가치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나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직면하도록 만든다.


지금까지의 정의론은 일종의 칸트적 윤리론에 의지하고 있다. 올바른 것이라고 정해진 것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다. 올바른 것과 좋은 것은 구분될 수 없다. 옳은 것은 그저 옳고 그 때문에 좋은 것이 된다.


이에 대한 비판은 여성주의 윤리학에서 활발하게 제기되어 왔다. 옳은 것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개별자들의 수많은 삶의 양상을 배제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 선택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정답에 맞추어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보장으로 그 성격이 달라져야 하고, 반박할 수 없는 보편적 정의라고 하더라도 맥락에 따라 그 실천의 방식이 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들으면 상대주의의 극단적 행보를 비판하면서 지켜야 할 정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한다고 꾸짖을 것이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위인들의 이야기는 국가를 위해 개인이, 공적 삶을 위해 사적 삶이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을 또 그것이 매우 값지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사회 이슈에 늘 관심을 가지고, SNS에 정치 사회에 관한 뉴스 기사를 공유하면서 공분하는 일은 분명 가치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오클로스로부터 벗어나 데모스가 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가.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오클로스를 대신해 대표자들이 그들의 뜻을 공론장에서 논쟁하고, 그들이 원하는 세계로 점차 바꾸어 나가는 일.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각각의 오클로스는 자신의 삶에만 더욱 집중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싫다면 오클로스를 대변하는 자들이여, 우리가 정치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게끔 제대로 일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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