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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의미

이제야 본 <친절한 금자씨>

by 정선생

1.


너무나 늦게 <친절한 금자씨>를 VOD로 시청했다. 복수 3부작으로 유명했던 영화인데, 나는 그것을 이제야 본 것이다. 지루하지만 전체 줄거리를 기억하기 위해 간단히 써 본다.

2. 24개월 아들의 낮잠시간 동안 보느라 대사를 정확히 듣지 못한 채 본 영화의 줄거리…


이금자는 백 선생을 찾아 복수하려고 한다. 개인의 복수에 그치지 않고 그가 유괴 살해한 모든 아이의 부모와 함께 복수를 감행한다. 법의 처벌과 개인적인 방식의 처형. 그 사이에서 사람들은 갈등한다. 양심의 가책 등을 운운하면서. 문득 유괴한 이유를 이금자에게 묻는다. 백 선생에게 자식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금자는 그가 자식을 만들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분노한다. 자식도 없는 인간이 왜 그런 짓을. 그러나 그 분노의 방향은 왠지 어긋난 듯하다. 자식도 없는 인간이 그 많은 돈이 왜 필요했느냐는 것이다. 이금자는 눈물을 머금고 말한다. 요트를 사려고 했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제 일말의 동정심도 가지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대신 한꺼번에 들어가느냐, 순번을 정해서 들어가느냐는 문제만이 남는다. 결국 순서대로 각자의 방식대로 복수를 하기로 하고, 그 위대한 처형식이 시작된다.

복수를 마친 후에 이금자는 죽어버린 백 선생의 이마에 총알 두 발을 박아 넣음으로써 자신의 복수도 마무리한다. 이금자가 일하는 빵집에 모여 케이크에 초를 5개 밝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자신의 복수로 인해 하늘나라에 있을 어린이들이 안식을 얻었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가장 가난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던 한 젊은 여자가 조용히 쪽지에 뭔가를 끄적인다. 그리고 케이크를 나눠주고 자리에 앉은 이금자에게 속삭인다. 돈은 계좌로 보내주는 거냐고. 이금자는 흠칫 놀란 듯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계좌번호를 적은 쪽지를 남겨 놓는다. 빵집에서 일하는 젊은이(이금자를 사랑하는?)가 들어왔을 때, 부리나케 도망친다.

이금자는 모두 돌아간 후 거울을 보며 자신의 더럽혀진 얼굴을 단장한다. 옆을 돌아보니 자신이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사내아이가 앉아 있다. 담배를 머금고 있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이금자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입에 재갈이 물리고 눈 앞에는 성인이 된 아이가 서 있다.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돌아가 버리고, 이금자는 그대로 앉아있다.


3. 나름 문학박사의 내 멋대로 감상


마지막 장면에서는 '금자씨'는 두부를 꼭 닮은 하얀 케이크를 만들어 딸에게 달려간다. 딸도 아마 그 소년의 영혼에 이끌려 엄마를 만난다. '금자씨'가 되찾고 싶었던 딸은 어쩌면 그의 영혼을 구원해 줄 유일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하얀 케이크를 먹자고, 하얗게 살자고 말하는 '금자씨'에게, 내리는 눈을 받아먹으며 더 하얗게 살자고 말하는 딸 앞에서, '금자씨'는 케이크에 얼굴을 처박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영화를 본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이금자의 딸은 결코 순수한 영혼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복수를 다짐했다던 딸은 복수를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단지 얼굴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 앞에 나타난 '금자씨'에게 아주 상세한 해명을 요구했고, 미안하다는 말을 세 번 이상 할 것을 요구했다. 백 선생을 죽일 것이냐고 묻고, 왜 죽이는 것인지 이유를 묻는다. 죽음 앞에서 '금자씨'의 딸은 태연히 이유를 묻는다. 죽음은 그저 두렵고 영원히 유보하고 싶은 현상일 텐데 말이다('금자씨'와 함께 한국으로 가고싶다며 양부모 앞에서 목에 칼을 겨누는 모습도).


결코 씻을 수 없는 죄를 씻어내기 위해 사람들은 흔히 복잡한 수사[修辭]를 요구한다. 그러한 수사가 있으면 죄를 지은 사람은 죄를 씻고, 화를 입은 사람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이다.


이금자가 죽인 것으로 되어 있던 그 남자아이도 그 사실을 알았으리라. 그러니 무언가를 말하려던 이금자에게 '닥치라는 뜻으로' 재갈을 물리지 않았을까. 말은 언제나 죄를 겉돈다. 언어는 그 어떤 것도 명확히 드러낼 수 없다. 그러니 어떠한 말로도 죄를 씻을 수 없다. 언어는 죄가 무엇인지조차 밝혀내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오직 말뿐인 법은 죄를 씻어주지도 벌하지도 못한다.


법의 처벌 대신 피의 복수를 선택한 피해 아동의 부모들은 어떤가. 그들이 원한 것은 결국 자신의 안위였다. 계좌번호를 또박또박 적어서 '금자씨'에게 내밀고는 가증스러운 신앙심으로 천사를 운운하는 그들은 얼마나 악마적인가.


복수는 의미가 있는가? 혹은 없는가? 복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주인공은 복수에 성공하지만 곧 복수에 의해 죽어가고 만다. <올드보이>의 주인공도 복수에 성공하지만, 결국 복수를 당하고 말았다. 금자씨도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영혼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복수를 하면서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나마 이들이 순수하게 복수를 꿈꾸었다면, '금자씨'가 데려온 그 피해자의 가족들은 무엇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인가. 그들은 누구에게도 복수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라고? 백 선생을 살해하는 순간까지는 모르지만, 계좌번호를 적는 순간 그들의 양심도 사라졌다) 진정한 악마가 아닌가.


'금자씨'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받고 싶었지만 결국 구원받지 못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금자씨'를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내레이션은 인간다움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한다. 구원받지 못할 위선과 모순을 저지르면서, 애처롭게 구원을 원하는 모습.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을, 신이 인간을 사랑(연민)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닌가?


문득, 죽은 자는 복수에 관심 없을 것이다는 제임스 본드(<퀀텀 오브 솔러스>)의 대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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