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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확실성과 불확실성 사이에서

by 정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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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고 싶은 영화의 줄거리, 평가와 분석을 찾아본다. 심지어 결말과 반전도 찾아보고 그 영화를 본다. 다시 말하면 결말과 반전이 마음에 드는 영화를 본다. 그러나 실제로는 스포일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들 공감하는 것처럼, 영화를 감상하는 이유가 단순히 결말을 알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런데 영화가 ‘서사물’이라는 점을 부정하기도 힘들다. 이야기는 몰입이 중요한데, 이미 어떤 중요한 내용을 알고 있다면 몰입하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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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사물의 핵심이 결론인 것만은 아니다. 결말을 안다고 해서 서사를 즐길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서사의 힘’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멋진 이야기꾼은 뻔한 결말을 가지고도 전혀 다른 과정으로 들려줄 수 있다. 판소리는 관객들의 반응에 따라 줄거리를 마음대로 조정하고는 했다. 소리꾼이 특별히 자신만의 개성을 넣어 부르는 대목을 ‘더늠’이라고 불렀다. 이미 판소리꾼의 명성을 알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모습에서 즐거움을 찾고는 했다.

영화는 이른바 '플롯'이라는 조직된(구성된) 시간 속에 관객을 초대하는 것이다. 다만 영화는 이미 제작된 상태이기 때문에 관객에 따라 변형할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미 친구 혹은 원수가 스포일러를 했다고 하더라도 영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분석하며 보면 된다. 감독이 의도한 대로 관람하는 것은 어쩌면 옛날 방식인지도 모른다. 현대의 관객들은 모두 비평가의 안목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기껏 그 영화의 결말이나 반전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영화의 재미가 쉽사리 반감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말에 다다르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미묘한 감정과 표정에 집중할 수 있고, 또 결말이나 반전이 얼마나 수긍할 만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따져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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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종종 인생에서 스포일러를 기대한다. “당신은 성공합니다.”, “당신은 실패합니다”, “당신은 반전 있는 삶을 삽니다”와 같은 스포일러를 말이다. 불확실한 미래 대신, 정확한 결말을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를 볼 때는 스포일러가 싫은데, 그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누릴 권리가 있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서 결론을 마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 두 경우 모두 ‘불확실성에 대한 부담감과 거부감’을 바탕에 두는지도 모른다. 이미 정해진 인생의 결말을 향해 그저 나아가기를 바라는 사람과 이미 결론과 반전을 알아버린 상태에서 자신만의 재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기를 주저(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의 접점. 그 접점에서 도전을 추구하자면서도 사실은 안전과 안정을 바라고 있는 인간을 목격할 수 있다. 많은 위대한 위인들이 그것을 타파하자고 말했지만, 또 도전하며 살지 못하는 자신을 소시민이라 자조했지만, 우리는 모두(대체로) 확실성을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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