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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이란 심해처럼 무섭다

영화 <47미터>

by 정선생

<47미터>.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된 영화다. 첫 장면은 보지 못했지만, 전혀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줄거리의 핵심은 모두 볼 수 있었다. 여행 가서 철창 속에 들어가 상어를 구경하다가 사고를 당한다는 내용. 나는 여기에서 인간의 욕망 두 가지를 본다.


https://en.m.wikipedia.org/wiki/File:47_Meters_Down_(2017)_Theatrical_Release_Poster.png


인간은 왜 그토록 자연을 가까이 구경하고 싶어 하는가. 달리 말하면 다른 동물이 주어진 생태계에 맞춰 살아간다면, 왜 인간은 자꾸만 새로움(도전?)을 추구하려 하는가.


이 질문이 불편할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반증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 자체가 자연의 일부임을 망각한 채, 감히 자연을 '구경거리'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재앙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는 바와 같이, 동물원이 비판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인간 문명은 자연 앞에 당당하기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며, 영화에서는 동생의 당당한 도전과 언니의 공포와 망설임으로 대비된다. 동생의 설득에 언니까지 바닷속에 들어갔지만, 사고로 47미터 심해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정작 이 영화의 핵심은 상어의 공포가 아니라, 언니가 동생을 향해 보여준 부러움 내지는 질투다. 단 몇 줄의 대사로 처리된 이 부분이 어쩌면 이 영화의 결말을 무섭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한 남자의 마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언니에게, 동생은 우리는 경쟁자가 아니잖냐고 말한다. 심해에 갇혀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고백처럼 보였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이라면 그런 고백을 할 있었겠지만, 아직 그리 절망적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쨌든 동생은 죽었고, 언니는 질소 중독에 빠져 동생과 함께 살아남는 환각에 빠진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그 경계에 머물기를 자처한다. 그와 동시에 역경을 해쳐나갈 선구자를 찾고 그에게 온갖 찬사를 보내지만, 결국 그의 희생으로 자신이 생존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겁에 질린 언니를 위해, 온갖 두려운 상황을 뚫고 해결하고자 했던 동생의 죽음이, 결국 언니의 생존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면서, 보호해야 한다며 안타까워하는 모순(정복이든 보호든 인간이 자연에서 멀어짐을 인정하는 행위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하고 말하면서 정작 용감한 자 뒤에 숨어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모순. 이 불편한 욕망을 <47미터> 심해에서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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