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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Mar 07. 2019

죽음이 두려운 자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한 젊은 화가를 죽음으로 내몬 뒤 '깊이'에 대한 찬사를 쏟아낸 비평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술에 깊이를 더하는 것은 어쩌면 죽음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영원한 타자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결코 주체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자살을 선택한 경우는 더하다. 궁극을 추구하다가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되는 비극적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영혼이 아름다움으로 완성되었으리라 믿는다.


오선지와 캔버스 위에서 펼쳐지는 예술작업과 달리 인생이 반드시 아름다움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미루어두더라도, 잊고 싶은 기억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욕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삶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나의 주변에서 함께 숨 쉬는 타인들에게 우리는 신경을 곤두세운다. 의식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마음 자체를 의식함으로써 부자유에 갇히고 만다. "가볍게 산다는 건 결국은 스스로를 얽어매고"라는 김광석의 노랫말에서 이와 비슷한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행복은 망가진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놓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만을 딛고 이 험한 세월의 강물을 건널 수 없다. 수영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영법과 호흡에만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삶에 몸을 담그고 허우적거리는 우리들에게 행복한 순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유람선을 타고 가는 사람들에게나 보일 법한 행복의 순간들.


자유롭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서 혼자이길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의 선택은 과연 스스로 결정한 것인가. 그렇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선택의 순간에 끼어드는 수많은 얼굴들. 그 얼굴을 일일이 바라보면서 선택을 해야 하는 우리는 결코 자신의 욕망대로 결정할 수 없다.


자살의 고결함은 그 죽음이 온전히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에서 온다. 내가 떠남으로써 슬퍼할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자신의 내면 깊이 침잠하는 일. 그것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만도 없다. 그는 충분히 슬퍼하고 망설였으므로. 그러나 그는 겁쟁이도 아니다. 오히려 삶을 어려움을 돌파하는 용기 이면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버티고 있지 않을까. 


국가와 사회라는 시스템에서 자살은 분명 큰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자유를 갈망하는 순수한 인간으로서 개인은 오직 존재의 자유를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고통스러운 삶의 순간을 벗어나는 일. 그러나 나는 죽음이 두렵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삶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자유를 바라면서도 나는 고통의 바다에 빠져 영원히 허우적거리고 있다. 언젠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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