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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그저 한 사람.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by 정선생

오늘은 광복절이다. 일제로부터 '벗어난' 날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8.15 광복인지, 해방인지를 놓고 각축을 벌였다. 해방은 주어진 것이고, 광복은 쟁취한 것이다. 그 단어 하나에 국가의 존엄이 좌우된다.


광복절이고 해서 뭔가 영화를 보고 싶었다. 이번 달 무료 VOD 목록에 있던 영화 가운데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봤다.



유관순은 한 사람을 넘어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유관순은 어렸고, 여성이었고, 강했다. 유관순이 지닌 이러한 개인적 특성은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어린 아니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저항했던 사람으로 해석하는 예가 그렇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여권[女權]을 이야기할 때 신사임당과 유관순은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중에서 유관순은 근대국가의 관점에서 '애국심'을 강조하기 좋은 예, 여성주의 운동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곤 한다.


영화는 3.1 만세 운동 1주년이 되는 기간까지의 감옥 내부를 보여준다. 극화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다.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여성'과 그중에서도 '천한 대우를 받던 여성(다방 종업원과 기생 등)'이다. 그들은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도 자신의 삶이 보잘것없었음을 한탄한다. 그나마 최소한의 인간 대우는 받던 그들이, 일제에서는 '노리개, 변기통'에 불과한 존재임에 절망한다. 그들이 만세를 불렀던 이유는 어쩌면 나라를 되찾기보다, 그들의 자유를 되찾기 위한 당연한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이 흘렀다. 오라버니와 언니(함께 수감된 기생 출신의 여성)를 접견하던 유관순은 걱정하는 그들 앞에서 말한다. 여기서 나가면 할 것이 많다고. 그것은 어딘가를 다니고, 오라버니 밥상을 차려주는, 그저 그 당시 여성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강인한 존재로만 각인된 유관순의 입에서 나왔기에 더없이 슬펐다.


영화 속 유관순은 밥 잘 먹고, 오라버니와 허물없이 지내며, 명랑한 소년이다(여기에서 소년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소녀는 여성을 구분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냥 어린 나이를 가리키는 소년을 사용했다. 청소년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 당시에 청소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소년이었기에, 어쩌면 잃을 것이 없었는지 모른다. 소년이었기에 꿈을 꿀 수 있었고, 그 꿈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꿈은 다른 이들의 꿈으로 이어졌다. 몰래 그리던 태극기는 이제 당당히 집집마다 걸 수 있게 되었다. 무력[武力]에 맞선 무력[無力: 힘이 없음이 아닌, '없음으로서 힘!']. 결코 볼 수 없는 그 힘이야말로, 일제가 두려워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유관순을 독립운동가로 기억하는 것도, 유관순을 여권 신장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 다만 그중 하나에 치우칠 필요는 없다. 유관순은 그저 자유롭고 싶은 한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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