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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칸다와 서구 중심주의

<블랙 팬서>를 이제서 보고 쓰는 감상문

by 정선생

영화는 VOD로 더 정확하게는 무료로 볼 수 있는 행사가 있을 때 본다. 정말 좋아하는 영화라면, 결제할 수도 있다. 오늘은 <블랙 팬서>를 봤다. 아들이 낮잠 자는 틈에 소리 없이 자막으로만 봤다. 중간에 부산에서 촬영한 장면에서는 소리를 무려 2로 키우고 스피커 가까이 가서 대사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소리 끄고 자막을 봤다. 윗집의 층간소음과 함께라면 4D 부럽지 않다.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소름 끼친다.

<블랙 팬서> 포스터, 위키백과

<블랙 팬서>는 재미있는 영화다. 최초의 인류가 탄생한 아프리카가 사실은 지구 상에서 가장 완벽한 물질(외계에서 왔으니까) 보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이미 최첨단의 기술문명을 갖추고 있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술을 정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그들의 안전을 지키는 데에만 사용했으며 따라서 바깥에 고도의 문명을 보여주지 않았다. 여전히 최빈국으로서 미개의 삶을 이어가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


내가 본 영화의 핵심은 왜 그들의 기술 문명이 현재의 서구 문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슈퍼맨이 그저 초인적인 힘을 가진 외계인이라면, 배트맨 아이언맨 앤트맨 같은 대부분의 영웅은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활동한다. 헐크나 데드풀도 결국 과학으로 인한 변종이라는 점에서는 기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영웅이다.


나는 여기에서 서구 중심적인 사고를 읽는다. 서구 과학 문명의 발달이야말로, 세계의 원리와 조화 따위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던 동양이나 아프리카 원주민 및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정복하는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자동 기계의 발명이, 인간도 신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를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번졌다는 분석은 이제 너무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와칸다는 아프리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는 미국이다. 와칸다를 떠받치고 있는 완전한 과학은 미국이 꿈꾸는 과학이며, 아프리카인들이 추구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처럼 그려진다. 지구를 살리는 방법, 빈민을 구하는 방법, 전쟁을 억제하는 방법도 모두 최첨단의 기술, 무기로 가능하다고 믿는 과학(기술) 만능 주의를 연장한 것처럼 보인달까.


<블랙 팬서>는 와칸다에서 살지 못하는 흑인들을 위해, 그리고 모든 인류의 출발점인 아프리카가 다른 대륙의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세계무대로 나오는 장면에서 마무른다. 그리고 미국인지 모르겠으나, 서구인은 묻는다. 세계 최빈국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기술이 없으면 가난하면 세계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믿음을, 블랙 팬서는 부정하지 못한다. 오직 과학기술의 집약으로서, 블랙 팬서의 슈트가 가진 놀라운 힘으로서만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의 진정한 마음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조금 아쉬운, 어쩔 수 없는 오리엔탈리즘적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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