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청년의 죽음과 사라지지 않는 인종주의

by 정선생

최근 미국에서는 조깅 중이던 흑인 청년을 살해한 백인 부자의 처벌을 둘러싸고 여론이 들끓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주택가에서 조깅을 하던 흑인 청년을 자동차로 뒤따라가 가서 소지하고 있던 총기를 이용해 살해했다. 그러나 이들은 법정에 서지 않았고, 두 달 남짓 동안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을 담당하던 검사가 직업적 친분을 들어 사건 담당을 포기한 것, 시민체포법이라는 조항을 근거로 무죄라고 주장한 것 등이 도마 위에 올랐다(‘조깅하던 흑인을 사살한 백인들은 왜 사법처리 안됐나?’, 《한겨레》, 2020.5.14.)


인종차별은 보편적 인권을 추구하는 현시대에는 없어져야 할 관념이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는 여전히 인종 간 우열이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이른바 ‘유색인종’을 향한 혐오와 차별을 서슴지 않고 있다. 비단 위에서 언급한 사건뿐만이 아니더라도, ‘코로나 19’가 발생한 직후에 유럽에서 발생한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도 인종차별이 여전히 인간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유색인종을 향한 백인의 차별만큼, 백인을 향한 유색인종의 혐오도 존재할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과 그에 반하는 옥시덴탈리즘이 그러한 관념의 뿌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성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존엄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생각이 인간의 본성에 반하지 않는지 의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관념은 동물로서 인간의 본성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홉스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은 오직 투쟁하는 존재일 뿐인데(홉스는 자연 상태의 인간을 ‘만인의 투쟁 상태’로 정의했다), 그로 인한 무질서를 극복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의 통일된 가치관이 필요했을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근대 민족 국가를 ‘상상의 공동체’라고 규정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조화 역시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일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에게 위기가 닥치면 언제든지 타인을 부정하고, 차별과 폭력으로 맞설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위기이든, 자기 가족의 위기이든 상관없다. ‘코로나 19’와 같은 전 세계적인 위기에서도 타인을 향한 동정만큼이나, 자신을 위협했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니 말이다.

다시 미국에서 발생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미국이 자유로운 나라, 모두에게 기회의 평등이 제공되는 나라라고 알고 있다.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말은 미국으로 건너가면 성공할 수 있다는 부푼 기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속에는 백인 중심 사회에서 수많은 차별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 우리가 이곳에 이주해 살 기회를 주었으니, 신고식(통과의례)을 견뎌내라는 것이다. 만약 이겨낸다면, 기꺼이 이 땅에서 풍요롭게 살도록 해 줄 것이라는 듯 말이다(유럽이나 미국에 유학 갔을 때 경험한 인종차별 스토리를 보면, 그 속에는 이와 같은 통과의례적인 속성이 존재한다).


덴젤 워싱턴이 감독하고 주연을 맡았던 <펜스>라는 영화는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면서도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하는 미국 사회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야구선수를 꿈꾸었던 주인공 트로이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믿으며 사회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그의 복잡한 심경은 마당의 나무에 묶어둔 야구공을 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아무리 때려도 멀리 날아가지 못하는 야구공은 그의 처지를 상징한다. 그럼에도 늘 술에 취해 헛소리를 지껄이다가도 야구공을 치는 주인공처럼, 아메리칸드림은 조금만 노력하면 이 땅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고문이었는지도 모른다(물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을 향한 아들의 꿈과 희망마저 꺾어 버린 주인공의 모습에 집중한다면, 트로이는 단지 자신의 ‘울타리’에 갇혀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한 죄인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조깅하던 흑인 청년이 왜 잔혹한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 짐작할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짐작할 수 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라며 애써 떨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가 백인 중산층이 사는 주택가를 조깅했기 때문인지도, 건축 중인 주택을 구경하고 돌아가는 그 모습이 피의자의 눈에는 주제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범죄자를 처벌하지 않았던 사회 전체가, 원주민을 학살하고 일궈낸 이주민의 역사는 자신을 몰아내려는 다른 이주민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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