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여성을 위해서
캐롤 길리건, "담대한 목소리"를 읽고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은 가부장제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트라우마를 만든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상징적 권력 앞에 남자 아이는 ‘형태상’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성성’에 맞춰 자라야만 한다. 여자 아이는 ‘형태상’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성’에 맞춰 자라야만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실제 목소리를 빼앗기고 타인이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 (인류) 사회는 ‘남성’이어야만 성공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생존할 수 있다. ‘여성’이 된다면 도태되고 생존 가능성도 낮아진다.
‘네 멋대로 살라’는 말은 모순이다. 문자 그대로라면 ‘네가 가진 멋(개성)에 따라 살아가라’는 의미이고, 그래서 그의 개성을 존중하는 표현처럼 읽혀야 정당할 듯싶다. 그러나 실제로 이 표현이 쓰이는 맥락을 보면, ‘법’, ‘도덕’, ‘규칙’, ‘권위’ 따위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며 반항(저항)하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너를 포기하겠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부모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은 ‘네 멋대로 하고 살라’는 말과 함께 울타리 너머로 방치될 위험에 처하고,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사회에서조차 ‘네 멋대로 하고 살라’는 말과 함께 방치된다.
길리건은 페미니즘의 가장 중대한 과제는 ‘아이의 복지를 최우선에 두는 것’이라고 당부한다. 아마 그 이유는 페미니즘이 지금 당장의 여성 해방에만 그치지 않고, 남성과 여성의 ‘형태상’ 구분과 상관없이 모두가 자신의 ‘여성성’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시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회가 규정한 ‘남성’에 맞추지 않더라도 그가 생각하는 남성(이는 우리가 아는 남성이 아닐 것이다)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유,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터무니없는 차별을 당하다가 스스로 ‘남성’이 되거나 ‘남성에 조력하기’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항구적으로 주어지기 위해서는, 지금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을 제대로 기르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겠다.
나는 길리건이 보여준 여러 상담 사례들을 보면서, 그 교육 방식이 아이들에게 ‘젠더 이분법을 적용하지 않는 데’ 있다고 느꼈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데에는 그저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굳이 ‘남자답지 못하게’라며 울음을 그치게 할 필요는 없다. 허구한 날 넘어지고 깨지는 아이에게 굳이 ‘여자아이가 왜 그렇게’라는 식으로 나무라지 않아야 한다.
정서와 감정, 그리고 생각이 자유롭게 흐를 수 있도록 내버려두면서 그저 보호해 줄 수 있을 때, 그 아이는 자신이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 혹은 ‘여성’이 아니어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럴 때에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제 멋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고, 다른 사람도 ‘제 멋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나아가 언젠가는 ‘제 멋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와 그럼에도 ‘남을 해치지 않을 존중과 배려’가 가득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목소리’(길리건에게는 ‘다른 목소리’이자 ‘담대한 목소리’겠다)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길리건의 말처럼, 페미니즘이 여성 혹은 남성의 문제에 국한된 것도, 그렇다고 남녀 대결을 부추기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가부장제’는 실제 남성과 거리가 먼 ‘상징적 남성성’에 맞춰 발전해 왔으며, 따라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여성성’을 억압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모두에 내재한(그럼에도 부당히 억압된) 그 ‘위대한 여성성’을 해방하는 것이, 내가 읽고 느낀 진정한 페미니즘의 지향점이었다. 길리건의 책은 내 생각에 다시 한 번 힘을 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