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bout THINGs

도장

나에게 운을 주는 도장

by 정선생

요즘 도장을 찍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대부분 서명을 한다. 그 마저도 직접 펜으로 하는 대신, 태블릿에 손가락으로 서명하는 일이 늘어난다.


가장 많이 서명하는 때는 신용카드를 긁고 나서다. 이미 텔레비전에서 소개된 것처럼, 매우 중요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정성 들여 서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고 보면, 자기 이름을 어딘가에 정성 들여 쓰는 일이 참 귀한 세상인 같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동의하고 빨리빨리 진행하는 데 익숙한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일까, 높은 권력에 오르는 일은 결정을 미루는 힘을 갖는 것과 같은지도 모른다. 여의도에서 일하는 분들의 요즈음처럼 말이다.

어머니께서 선물해 주셨던 도장. 이 도장을 찍으면 나에게 좋다고 하면서 주셨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아내와 나에게 도장을 만들어 주셨다. 며느리가 당신 아들과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아들이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 주셨다. 그래서 당신 손자도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물론 어느 점집에서 몇만 원을 주고 사주를 본 후 도장을 만들어 주셨을 게다. 물고기 인형, 사과 액자, 부적에 이르기까지 어머니께서 우리 부부에게 해 준 것이 많다. 물론 더 많은 것을 주셨고 지금도 주고 계시지만, 당신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없으니 물건을 빌리는 수밖에 없으신 거라는 걸 나는 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주신 도장을 어디에 써야 하나, 인감을 만들어서 거창하게 써야 하나, 막막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여기저기 편하게 쓰면 된다고 하셨기에 일할 때, 그러니까 학생들 작문을 첨삭하고 확인할 때 쓰고 있다. 얼마 전 공모전 심사에 참석해서는, "서명 또는 인"으로 되어 있는 심사위원 확인란에 기꺼이 이 도장을 찍었다.


기계식 시계에 만년필, 필름 카메라와 내려 마시는 커피처럼 도장은 어딘가 고전적인 감성을 준다. 그것이 서양의 것이 아닌, 정확하게 말하면 근현대 문명의 초창기 물건이 아닌, 더 옛날부터 우리 조상이 사용하던 물건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도장을 갖는다는 건 귀한 신분에게나 가능한 일이었으니, 얼마나 값진 물건인가.


가끔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밀랍에 문양을 찍어 봉한 편지봉투가 나오면 괜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빨간 밀랍에 내 이름을 새긴 인두를 지지는 번거로운 작업이 그 편지 하나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가끔 반지를 이용하는 경우도 봤다). 더욱이 섬세한 장인의 작업처럼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학생들의 공책을 검사하고 어머니가 주신 도장을 찍을 때, 괜한 책임감을 느낀다. 그것은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갑'의 책임감이다. 학생들의 글을 대충 살피지 않았음을, 그리고 지적하고 고친 내용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임감이다. 인주를 묻혀서 정확하게 찍히기를 바라며 지그시 누르는 그 일이,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리고 조금 더 여유로운 시간과 정성스러운 기분으로 이끌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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