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할 만한 것도 없지만, 자랑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다. 물론 지금은 아름다운 아내와 잘 자라고 있는 아들이 있어서, 자랑스럽다. 그래도 나 자신에 대해서 자랑할 만한 걸 찾을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 학교 복도에 걸렸던 동시도 나 자신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다. 허수아비에 관한 시였다. 대학에 들어와서 시를 썼을 때에도 나를 주어로 내세운 시를 쓴 적이 없었다. 한 선배가 그걸 문제 삼은 적도 있다.
평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안다. 어제 한 교수가 설명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해 왔으나(그 증거는 얼굴이란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은 감정을 조절하고 숨기는 방향으로 지속된 것이다. 평소 감정을 잘 조절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술에 취해 모든 것을 쏟아내는 이유도 그를 억누르던 사회화의 힘이 약화된 때문이다.
감정을 숨기는 사람,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칫 자신을 비난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 자기 능력을 불신하고 평가절하하며, 타인의 칭찬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칭찬을 들으면 쉽게 무너지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모습과 타인이 기대하는 모습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비관적인 생각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나 자신을 자책하거나 비하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잦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것은 지나친 겸손이 되기도 하고, 내가 이뤄놓은 일들의 의미를 축소함으로써 쓸데없는 비판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나를 편안하게 감싸는 이불이라면 우스울까.
여전히 나는 칭찬을 견디지 못한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춤추기 싫은 고래가 칭찬 때문에 춤을 춰야만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까. 칭찬을 거부하며 한 발짝 두 발짝 멀어질 때 나는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타인의 칭찬을 넙죽 받았을 때 평정심을 잃고 자멸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오늘 하루도 별 다른 성과 없이 마무른다. 성과 없음이야말로 내일의 사소한 일들에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가치를 얻자마자 자체의 사소함 때문에 다시 무가치해질 것이다. 그럼 또다시 자책할 것이다. "아, 오늘도 난 해낸 게 없어"라고. 그 자책은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만든다. 내일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내일의 모든 일들이 오늘보다 가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