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 다닌다고 불교신자는 아니잖아?
법사[法師]는 본래는 산스크리트 어인, ‘다르마 바나카(dharma-bhanaka)’를 번역한 말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통하여 이를 가르치는 승려를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선생님이다. 따라서 홀로 수행하는 스님이 법사일 수는 없겠고, 대중이나 다른 승려를 가르치는 경우에만 법사라고 부를 수 있겠다. 나아가 법을 설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교를 포교하는 역할도 자연스레 수행할 수 있다.
우리가 소위 참스승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표리부동하지 않다는 말이다. 예컨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다른 사람 앞에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면, 그 부모는 아이에게 참스승이 아니다. 아이는 결국 부모가 스스로의 말을 부정하는 모습만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반대로 필요한 경우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자신도 거짓말을 적절히 사용하는 부모라면, 아이에게 오히려 참스승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대부분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에 닿아있다. 스님의 거처가 속세를 벗어난 장소인 이유도 욕심과 집착이 일어날 가능성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다. 물론 이로써 불교가 중생의 삶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는 생각하기 나름이겠다.
산사에 머물며 수행만 하는 스님이라면 스승이기보다 영원한 부처의 제자이기를 선택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법사라고 칭하는 이들은 중생과 다른 스님 앞에서 참스승이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집착과 욕심을 버리라고 말하면 자신이 먼저 모든 집착과 욕심을 버려야 한다. 심지어 기도와 수행의 형식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불전함의 수입에도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인연에 집착하지 말라면, 그 누구도 붙잡으려 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절이나 포교원을 들어오든 나가든, 속세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말이다. 어디에선가 한 스님은 속세를 등진 후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잠시 내려가 최소한의 도리를 다한 후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움과 슬픔조차 집착인 것을 알기에 그조차 내려놓으려고 했다면서 말이다. 이런 스님의 도량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작은 일에도 화가 나고, 서운함을 느끼는 것이 중생이라면, 스님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다스릴 수 있도록 수행한 사람이다. 법사라면, 다른 스님의 수행을 이끌어 주고, 부처님의 참뜻을 중생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활동이 자격증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법사라는 이름도 단순한 자격증 명함밖에 되지 못하는 듯한 아쉬움이 있다.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본다면 이름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써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지금 당신은 법사라는 이름에 집착하여 그들을 그 이름 안에 가두려 한다. 법사는 이름이 법사일 뿐이지, 법사라는 실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법사가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것조차 어리석은 집착일 뿐이다.”라고.
개인적으로 경험한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여전히 절에 다니기는 해도 불교를 나의 종교로 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