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선생 Nov 15. 2020

잘못 내려놓은 마음

부처의 말씀이 경전 속에 있지 않다고 했다. 경전은 번데기처럼 깨닫는 순간 버려야 하지만, 많은 사람이 경전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경우가 많다. 경전을 애지중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전을 외우고 새로운 해석을 덧붙이지 않으려는 노력 같은 걸 말하는 중이다. 부처의 본뜻을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적극적인 해석을 내놓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유명한 <반야심경>을 새긴 현판이 계단실 중간에 버려져 있었다. 굳이 보고 외우지 않아도 앎과 행함이 일치하게 된 것일까? 마치, 지금 자신이 버린 현판은 사라지고 말 공이라고 주장하듯, 너무 반듯하게 세워진 게 어쩐지 우스웠다.

부처의 말씀은 쉽게 읽히다가도 어느 순간 너무 모호하고, 심지어 모순되기까지 하다. 문답으로 된 장면에서 반복되는 제자의 질문에 부처가 들려주는 대답이 황당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금강경>만 읽어봐도 그러하지 않나. 물론, 진지한 마음으로 꾸준히 읽고 공부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지만, 경전공부보다 독서로서 즐기는 사람에게는 어렵기만 하다.

존재함이 존재하지 않음이고, 존재하지 않음이 곧 존재함이라는 말은 마치, 존재자 이전의 존재를 상상하는 하이데거처럼 난해하기만 하다. 하이데거를 비판했던 아도르노처럼 마음속에서는 의심이 끊이지 않는다. 물론,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말이라고 평범하게 받아들이면 쉽지만, 정말 그 정도일까? 우리는 부처의 가르침을 얼마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부처가 살아 있어 직접 설교를 듣는다 하더라도 쉽지 않을 듯하다.

사실,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굳이 따로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이라면 옷에 흘린 밥알 하나조차 빼앗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면 충분할 듯싶다. 그렇게 작은 것도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면, ‘생명’은 더할 나위 없고 말이다.


계단실에 놓인 <반야심경>이 내게 많은 생각을 들인다. 현판은 제법 무거워서 청소하는 아주머니께서 치우기도 번거로워 보이고 행여, 누군가 가져가기를 바랐다 한들 도둑이 될까 저어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민간에 저런 물건을 함부로 들이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하지를 않는가.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마음이 반야심경으로 깨우친 것은 아닐 터이고, 어쩌면 마음을 갈고닦는 노력에 신물이 나서 갖다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순투성이의 부처에게 실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부처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믿고 따르면 기적을 볼 수 있다고 말한 적은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부처가 보여주고 싶었던 기적은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심지어 나 자신의 생명조차도 스스로 탐하지 않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면, 부처를 그리 좋아한 이도 진지하게 공부한 이도 아닌 듯싶다. 만일 그가 경전을 떠나 자유로울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왜 하필 저것을 두고 갔을까? 차라리 아직 쓸 만한 다른 물건을 내려놓고 갔으면 갔지.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세요.”라는 담백한 쪽지와 함께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민낯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